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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죄의 초밥

등록 2012-12-05 18:02수정 2012-12-08 13:32

[매거진 esc] 독자사연 맛 선물
7년쯤 전 그해 겨울 제일 춥다던 어느 날, 막 대학 합격 소식을 받았던 아들 녀석이 친구, 선배들과 저녁을 먹기로 했다며 어두운 저녁 길을 나섰다. 말하자면 태어나 첫 공식 술자리였던 셈. 밤 12시가 될 때까진 그런대로 쿨한 엄마 모습을 보이며 그럭저럭 시간을 보냈는데, 아들은 새벽 1시 가까이 되도록 돌아오기는커녕 전화 연락조차도 없었다. 바깥엔 살을 에는 찬 바람이 부는데 몇 분 간격으로 계속 아들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봐도 “그대 목소리가 들려” 하는 컬러링 소리만 무정하게 흘러나왔다.

새벽 2시 반이 넘어서면서 난 완전 빈사상태. 온갖 나쁜 상황들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3시 가까이 되어 드디어 아들 목소리가 저편에 나타났다. 지금 택시 타고 집에 들어가는 중이란다. ‘천만다행이다’ 하고 한숨은 돌렸는데 멀쩡한 얼굴로 들어오는 아들을 보고 나니 화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 난 식탁을 깨끗이 비워둔 채 당시 다니던 영어학원에 가버렸다. 학원 끝나고도 아들 녀석 꼴보기 싫어 혼자 쏘다니다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집에 들어섰더니 웬 식초 냄새가 집 안 가득했다. 식탁에는 처음 보는 연두색 예쁜 초밥이 한가득 큰 접시에 놓여 있었다. 엉거주춤 방에서 나오는 아들 녀석이 어색한 목소리로 “점심 드세요”라고 한다. 괜히 감동받은 척하기가 싫어 아무 소리 없이 식탁에 앉아 초밥을 먹었다. 오이를 얇게 썰어 밥에 두르고 날치 알을 듬뿍 얹은 초밥은 첫 솜씨라곤 믿기지 않게 모양도 맛도 아주 좋았다.

며칠 뒤 우연히 아들 미니홈피를 봤더니 ‘사죄의 초밥’이란 제목으로 날치 알 초밥 사진이 올라가 있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밥이 없었다. 엄마가 아침밥도 안 차려주고 나가셨다. 이럴 수가. 나 밥 먹이는 걸 제일 큰일로 생각하셨는데! 정말 화가 많이 나셨나 보다. 그래서 인터넷 뒤져서 초밥을 만들었다.’

고것 참 쌤통이다 싶기도 하고 한편 이렇게 어른이 되려나 보다 싶어 흐뭇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착각이었다. 지금도 술 먹고 연락 두절이 되는 일은 여전히 종종 벌어진다. 거기다 이젠 엄마 화내는 것도, 아침밥 안 주는 것도 무섭지도 않아 사죄의 초밥은커녕 사탕 한 알도 어림없다 식이다. 언제 진짜 어른이 될까!

정대은/서울시 영등포구 문래동

응모 방법 ‘맛 선물’ 사연은 esc 블로그(blog.hani.co.kr/hesc)의 게시판 또는 끼니(kkini.hani.co.kr)의 ‘커뮤니티’에 200자 원고지 5장 안팎으로 올려주세요. 문의 메일에 연락처와 성함을 남겨주세요.

상품 로헤 5종 세트(냄비 3종, 프라이팬 2종)

문의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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