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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악몽

등록 2012-12-21 09:58수정 2012-12-21 16:17

신지수 대한항공 A330 조종사
신지수 대한항공 A330 조종사
신 기장의 야간비행
신지수 대한항공 A330 조종사
<나의 아름다운 비행> 저자
나도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보내고 싶지만, 휴가 신청하기가 좀 미안하다. 우리 회사에는 외국인 기장이 많이 있는데, 크리스마스에 집에 보내주기 위해 한국인 기장들이 더 많이 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마다 이맘때면 마음이 들뜨다가도 결국 빡빡한 비행스케줄에 한숨을 내쉬며 올해는 또 어떤 ‘이국적인 크리스마스’를 맞게 될지 상상하게 된다. 남태평양의 푸른 크리스마스나 사막의 누런 크리스마스도 새롭지 않다. 해변에 산타 스타일의 비키니를 입은 아가씨도, 백화점 앞 크리스마스트리 건너편에 이슬람 사원이 있는 풍경도 이제는 어색하지 않다. 몇 년 전 호주에서는 어렵게 성당을 찾아 성탄 미사에 참석했는데 나중에 그 성당이 성공회 교회였다는 것을 알고는 따로 고백 성사를 하기도 했다.

작년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부산과 제주를 왕복했다. 제주에서 거센 눈보라를 만나 ‘꿈에서 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크리스마스의 악몽’이 되어버렸다. 적진 깊숙이 고립된 패잔병처럼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착륙을 하고 나니, 비행이 끝난 뒤에도 좀처럼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눈을 감고 비행기 엔진에 얼굴을 댄 채 온몸이 꽁꽁 얼 때까지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윙~’ 하고 울리는 차가운 금속 진동이 내 뺨을 쓰다듬어주는 것 같아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일을 마치고 호텔방 침대에 쓰러져 전화로 아내와 실없는 잡담을 하는데, 나도 모르게 갑자기 서러운 눈물이 나기도 했다.

며칠 전에는 한 외국인 부기장과 비행을 했는데, 공항 면세점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선물을 고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집이 어디냐고 물어보니,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프라하에 갔다가 브라티슬라바에 가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체코 사람이고 어머니는 슬로바키아 사람인데 이혼을 해서 따로 살기 때문이란다. 무식하게도 나는 ‘체코슬로바키아’ 아니냐고 물어보니 90년대에 나라가 분리되어 이제는 서로 다른 나라라고 가르쳐 주었다. “부모가 결혼할 때는 같은 나라 사람이었는데, 이혼할 때는 다른 나라 사람이 되었다”며 씁쓸한 농담을 하는 그의 표정 속에 크리스마스는 왠지 슬프게 느껴졌다.

세상에 상처 입은 사람은 많고 많다. 비록 나도 아프지만, 상처를 서로 보듬다 보면 가슴 따듯한 진짜 크리스마스의 사랑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크리스마스의 악몽도, 꿈속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도 모두 꿈일 뿐이다. 꿈속에는 산타와 루돌프가 있겠지만, 꿈에서 깨어났을 때 내가 곁에 있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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