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조령3관문~하늘재 사이의 마패봉에서. 뒷줄 왼쪽부터 권경옥, 김순주, 유명희, 정명숙, 앞줄은 곽명옥, 손승주씨. 손승주 제공
한국 여성 최초로 에베레스트 올랐다가 뿔뿔이 흩어진
이들이 다시 뭉쳐 백두대간 종주하는 이유
이들이 다시 뭉쳐 백두대간 종주하는 이유
1993년 등반때 평균나이 27
연맹과 갈등 내부 불화로
멀어졌다 마흔일곱 돼 해후 ‘언니 산악인’들이 지난 15~16일 이틀에 걸쳐 이화령~조령 3관문~하늘재를 이었다. 매월 둘쨋주 토~일에 이어나가는 백두대간 종주다. 2월 지리산 끝자락인 여원재에서 시작해 11번째이니 마라톤으로 치면 반환점쯤 이른 셈이다. 이들은 1993년 5월10일 지현옥, 최오순, 김순주씨를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려보내 한국 여성의 존재를 만방에 알린 한국히말라야여성등반대다. 하얀 산이 좋아 하얀 산을 오르다 죽어도 행복하겠다던 평균 나이 스물일곱 산처녀들은 마흔일곱 아줌마가 됐다. 백두대간 종주는 2013년 에베레스트 등반 20돌을 기념하기 위한 의식이다. 보통 몇 주년 기념이면 하룻밤 케이크 불이나 끄고, 술 한잔 마시면 그만인데, 산악인이었다고 하니 그럴 법하다. 하지만 이들이 등반 성공 뒤 뿔뿔이 흩어진 이래 20년 만에 처음 모였다니 사연이 있을 법하다. 무엇이 이들을 20년 만에 불러모으고, 무엇이 이들을 이태에 걸쳐 길고 긴 ‘동창회’를 하게 만들었을까. 한마디로 줄이면 상처뿐인 영광. 본디 에베레스트 얘기가 나온 것은 정명숙, 곽명옥, 남난희씨. 남성판인 산악계에서 한창 물이 오른 이들은 여성들끼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돈. <이마운틴> 남선우씨가 대한산악연맹과 연결해 주었다. 연맹에서는 아이디어를 수용해 제반 경비를 대주기로 하고 대원 선발과 등반훈련, 히말라야 원정 등 모든 행정과 실행을 떠맡았다. 전국에서 70여명의 ‘선수’들을 뽑아 올렸다. 5~6명으로 한 조를 편성해 남자 강사가 한명씩 붙어 설악산 등지에서 지옥훈련을 시켰다. 대장 지현옥, 부대장 정명숙, 대원으로 곽명옥, 이영순, 오은선, 권경옥, 임희재, 강인숙, 유명희, 손승주, 정건, 최오순, 박금옥, 김순주씨 등 14명의 팀이 최종 결성됐다. . 당시 훈련대장을 맡았던 산악인 장봉완(현 한국등산학교 교장)씨는 “남자들도 어렵다는 에베레스트에 도전하는 만큼 이들 스스로 정상에 오를 수 있도록 겨울철 설악산을 중심으로 어려운 코스를 골라서 수없이 반복훈련을 시켰다”고 회고했다. 연맹 쪽과는 늘 삐걱거렸다. 팀 구성이 될 무렵 바뀐 회장단은 비산악인으로 사사건건 개입했다. 대원들은 위원회가 열리는 사무실 문 앞에서 안건이 무사히 통과되기를 기다리는 날이 잦았다. 대원들에게 연맹은 적이 되어버렸고, 그들은 남성이었다. 선발된 14인은 40일간 자체적인 합숙훈련과 해외 원정을 했다. 누가 산에 오를 것인가를 결정하는 단계. 대장과 부대장이 조련사가 됐다. 대원들은 조련사 앞을 지날 때면 숨을 죽였다. 헐떡이는 모양을 보이면 눈 밖에 날까 봐서다. 먼저 목적지에 이르면 도로 내려가 대장의 배낭을 받아오는 것은 예의였다. 조련사들은 팀원을 성과 이름, 풀네임으로 부르고 이들이 하는 말은 법이었다. 대장은 명령하고 대원들은 듣고 따랐다. 혹시 대원 가운데 누군가 말을 꺼내려는 기미가 보이면 무릎을 쿡쿡 쳐 말렸다. 말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음을 알기 때문. 팀원들에게 대장과 부대장은 ‘그들’이었다. 우리 안의 적. 군대처럼 주민등록상 생일순으로 1번부터 14번까지 서열이 매겨졌다. 후원사인 코오롱에서 제공한 공용, 개인 등산장비에도 그 번호를 썼다. 속옷까지 똑같은 옷을 입은 이들은 자신의 것을 구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3년에 걸친 훈련 끝에 이들은 여전사가 됐고, 서울, 대구, 제주, 전남, 수원, 경남, 경북지부, 대학산악부 등 출신이 다른 이들의 팔도 사투리는 자연스럽게 뒤섞였다. 11차례 산에 오르면서
원정에 대한 기억 맞추며
서로에게 새겨진 상처 보듬어 꿈에 그리던 히말라야 원정. 카트만두에 미리 나간 선발대에 대장과 부대장 해임 통지가 날아들었다. 연맹과 껄끄러워 국내에서 한차례 해임소동을 벌였던 집행부가 이들을 제거하기로 했던 것. 대원들은 연맹과 연을 끊고 자비로라도 등반을 하겠다고 강경하게 맞서 해임을 철회시켰다. 대원들이 합류하고 캠프를 차렸다. 현지 적응이 끝나고 정상 공격. 첫 도전은 지현옥, 김순주씨, 두번째는 김순주씨 단독. 모두 실패했다. 세번째로 도전한 지현옥, 김순주, 최오순씨가 정상을 밟았다.
문제는 정상 등반 뒤. 정상공격조가 설맹(설산의 강한 자외선에 노출돼 한시적으로 앞이 안 보이는 현상)에 걸려 뒤숭숭한 상황에서 철수 결정이 내려졌다. 시도를 대표하는 팀원들은 모두 정상을 오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허물어졌다. 일부는 4캠프에 올랐던 정건씨가 정상공격조에서 제외된 것을 두고 철수 결정에 불만을 제기했다. 김순주씨가 가장 먼저 4캠프에 올라 배낭을 받아올린 탓에 체력 순번에서 앞선 지현옥 대장이 정건씨를 내려보내고 자신이 정상을 밟은 것은 대장으로서 올바른 처사가 아니었다는 것. 그런 와중에 팀원 권경옥, 이영순씨가 몰래 3캠프에 올라가 하룻밤을 자고 내려왔다. 이들은 어차피 정상에 오르지 못할 바에 7500미터급이라도 체험하고 싶었다.
등반 성공은 국내로 긴급 타전됐다. 네팔로 날아온 연맹 집행부는 카트만두에서 모든 대원들의 등산장비를 회수했다. 경유지 방콕에서 수고비로 팀원당 100달러씩을 줬다. 옷과 개인장비를 담았던 배낭은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연맹으로 실어갔다. 연맹 재산이므로 향후 다른 등반대를 위해 쓰겠다는 것이다. 정상공격조한테는 훈장이, 나머지 대원한테는 한 등급 낮은 포장이 수여됐다. 그리고 뿔뿔이 흩어졌다.
이들은 1999년 안나푸르나 등정 뒤 하산하다 추락·사망한 지현옥씨 영결식에 모인 것을 빼고는 한차례도 만나지 않았다. 사람이 싫었다고 했다. 최초이자 마지막 여성 히말라야 원정대는 그렇게 잊혀졌다.
20주년이 됐으니 뭔가 해볼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한 백두대간 종주.
왕언니들은 산에서 거듭 만나면서 개인별로 다르게 새겨진 원정에 대한 기억을 맞춰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 나갔다. 그때 너는 어땠어? 그때 나는 왜 그랬지? 그때 우리는 왜 그랬지? 하면서 서로에 대한 질시와 오해에서 비롯된 서로의 상처를 핥으면서 숱하게 울었다고 했다.
“히말라야를 함께 등반했다는 인연이 있었지만 우리는 지금 전혀 다른 사람들을 만나 사귀고 있어요.” 곽명옥씨의 말이다.
글·사진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 “수공에 떠넘긴 4대강 빚 때문 수도요금 인상”
■ 장동건 드라마 회당 1억원…연예계 출연료 ‘양극화’ 극심
■ “박근혜 정책이 MB와 다름 보여줘야 노동자죽음 막는다”
■ 박원순 시장 “박근혜 당선인, 온 대한민국 대통령 돼 달라”
■ 문재인, 비대위원장 지명 않기로
■ ‘솔로 대첩’ 참가자에 “왜 나왔냐?” 물었더니
■ 옷이든 뭐든 찬밥, 미안하다 아들 2호야
연맹과 갈등 내부 불화로
멀어졌다 마흔일곱 돼 해후 ‘언니 산악인’들이 지난 15~16일 이틀에 걸쳐 이화령~조령 3관문~하늘재를 이었다. 매월 둘쨋주 토~일에 이어나가는 백두대간 종주다. 2월 지리산 끝자락인 여원재에서 시작해 11번째이니 마라톤으로 치면 반환점쯤 이른 셈이다. 이들은 1993년 5월10일 지현옥, 최오순, 김순주씨를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려보내 한국 여성의 존재를 만방에 알린 한국히말라야여성등반대다. 하얀 산이 좋아 하얀 산을 오르다 죽어도 행복하겠다던 평균 나이 스물일곱 산처녀들은 마흔일곱 아줌마가 됐다. 백두대간 종주는 2013년 에베레스트 등반 20돌을 기념하기 위한 의식이다. 보통 몇 주년 기념이면 하룻밤 케이크 불이나 끄고, 술 한잔 마시면 그만인데, 산악인이었다고 하니 그럴 법하다. 하지만 이들이 등반 성공 뒤 뿔뿔이 흩어진 이래 20년 만에 처음 모였다니 사연이 있을 법하다. 무엇이 이들을 20년 만에 불러모으고, 무엇이 이들을 이태에 걸쳐 길고 긴 ‘동창회’를 하게 만들었을까. 한마디로 줄이면 상처뿐인 영광. 본디 에베레스트 얘기가 나온 것은 정명숙, 곽명옥, 남난희씨. 남성판인 산악계에서 한창 물이 오른 이들은 여성들끼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돈. <이마운틴> 남선우씨가 대한산악연맹과 연결해 주었다. 연맹에서는 아이디어를 수용해 제반 경비를 대주기로 하고 대원 선발과 등반훈련, 히말라야 원정 등 모든 행정과 실행을 떠맡았다. 전국에서 70여명의 ‘선수’들을 뽑아 올렸다. 5~6명으로 한 조를 편성해 남자 강사가 한명씩 붙어 설악산 등지에서 지옥훈련을 시켰다. 대장 지현옥, 부대장 정명숙, 대원으로 곽명옥, 이영순, 오은선, 권경옥, 임희재, 강인숙, 유명희, 손승주, 정건, 최오순, 박금옥, 김순주씨 등 14명의 팀이 최종 결성됐다. . 당시 훈련대장을 맡았던 산악인 장봉완(현 한국등산학교 교장)씨는 “남자들도 어렵다는 에베레스트에 도전하는 만큼 이들 스스로 정상에 오를 수 있도록 겨울철 설악산을 중심으로 어려운 코스를 골라서 수없이 반복훈련을 시켰다”고 회고했다. 연맹 쪽과는 늘 삐걱거렸다. 팀 구성이 될 무렵 바뀐 회장단은 비산악인으로 사사건건 개입했다. 대원들은 위원회가 열리는 사무실 문 앞에서 안건이 무사히 통과되기를 기다리는 날이 잦았다. 대원들에게 연맹은 적이 되어버렸고, 그들은 남성이었다. 선발된 14인은 40일간 자체적인 합숙훈련과 해외 원정을 했다. 누가 산에 오를 것인가를 결정하는 단계. 대장과 부대장이 조련사가 됐다. 대원들은 조련사 앞을 지날 때면 숨을 죽였다. 헐떡이는 모양을 보이면 눈 밖에 날까 봐서다. 먼저 목적지에 이르면 도로 내려가 대장의 배낭을 받아오는 것은 예의였다. 조련사들은 팀원을 성과 이름, 풀네임으로 부르고 이들이 하는 말은 법이었다. 대장은 명령하고 대원들은 듣고 따랐다. 혹시 대원 가운데 누군가 말을 꺼내려는 기미가 보이면 무릎을 쿡쿡 쳐 말렸다. 말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음을 알기 때문. 팀원들에게 대장과 부대장은 ‘그들’이었다. 우리 안의 적. 군대처럼 주민등록상 생일순으로 1번부터 14번까지 서열이 매겨졌다. 후원사인 코오롱에서 제공한 공용, 개인 등산장비에도 그 번호를 썼다. 속옷까지 똑같은 옷을 입은 이들은 자신의 것을 구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3년에 걸친 훈련 끝에 이들은 여전사가 됐고, 서울, 대구, 제주, 전남, 수원, 경남, 경북지부, 대학산악부 등 출신이 다른 이들의 팔도 사투리는 자연스럽게 뒤섞였다. 11차례 산에 오르면서
원정에 대한 기억 맞추며
서로에게 새겨진 상처 보듬어 꿈에 그리던 히말라야 원정. 카트만두에 미리 나간 선발대에 대장과 부대장 해임 통지가 날아들었다. 연맹과 껄끄러워 국내에서 한차례 해임소동을 벌였던 집행부가 이들을 제거하기로 했던 것. 대원들은 연맹과 연을 끊고 자비로라도 등반을 하겠다고 강경하게 맞서 해임을 철회시켰다. 대원들이 합류하고 캠프를 차렸다. 현지 적응이 끝나고 정상 공격. 첫 도전은 지현옥, 김순주씨, 두번째는 김순주씨 단독. 모두 실패했다. 세번째로 도전한 지현옥, 김순주, 최오순씨가 정상을 밟았다.
1993년 히말라야 등정 때의 여성등반대. 손승주 제공
이화령~조령3관문 사이의 암릉 구간. 손승주 제공
■ “수공에 떠넘긴 4대강 빚 때문 수도요금 인상”
■ 장동건 드라마 회당 1억원…연예계 출연료 ‘양극화’ 극심
■ “박근혜 정책이 MB와 다름 보여줘야 노동자죽음 막는다”
■ 박원순 시장 “박근혜 당선인, 온 대한민국 대통령 돼 달라”
■ 문재인, 비대위원장 지명 않기로
■ ‘솔로 대첩’ 참가자에 “왜 나왔냐?” 물었더니
■ 옷이든 뭐든 찬밥, 미안하다 아들 2호야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