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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장의 유행은 언제까지

등록 2012-12-26 17:18수정 2012-12-27 15:47

[매거진 esc] 이대리의 직장생태보고서
2012 겨울 패션 트렌드, 직장인에게는 사시사철 트렌드 ‘카무플라주’
머리를 하러 미용실에 들렀다. 손님이 많아 대기를 해야 할 때 으레 그렇듯 나는 잡지 하나를 빼 들고 휘리릭 페이지를 훑어갔다. ‘2012년 가을/겨울에 주목해야 할 트렌드는 카무플라주(camouflage)’라는 문장이 눈에 띈다. 그제야 며칠 전 지하철에서 어린 여학생들이 “카모백(camo-bag) 하나 사고 싶어”라며 친구들과 맞장구를 치던 말이 저 맥락을 지닌 축약어였구나 하고 알아챈다.

열살 무렵의 기억을 더듬어본다. 고향에 계신 모친은 당시 의상실을 했는데 ‘카무플라주’를 사투리가 버무려진 억양으로 ‘깜뿌라치’라고 말했다. 나는 무슨 뜻인지 모른 채 그 단어의 쓰임새를 관찰했다. 그리고 ‘화장품으로 얼굴의 잡티를 감추다’ 혹은 ‘옷의 착장을 통해 체형의 단점을 숨기다’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구나 하고 넘겨짚을 수 있었다. 아무튼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정식으로 그 단어를 활자로 접하기 전까지는 ‘~인 척하다’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실제 철자와 발음을 정확히 알았을 때부터 엄마가 가끔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다.

직장에서 우리는 종종 카무플라주를 한다. 집에서는 무릎이 툭 튀어나온 운동복을 입고 배를 긁으며 캔맥주를 축내던 이가 출근할 때는 감색 정장과 광낸 구두, 세련된 무늬의 넥타이로 나름의 위장을 한다. 소개팅에서 새 모이만큼 스파게티를 돌돌 말아 먹은 뒤 귀가해 잔량을 채워 넣는 커리어우먼 ㅇ대리에게 타조가죽 핸드백은 일상과 사회생활을 구분해주는 위장술의 꽃이다. 수년 전 어느 날, 집에 바이어를 자주 모시는 직업을 가진 ㄷ의 책장을 본 적이 있다. 그곳에는 꽤 어렵다고 알려진 각종 사회과학 서적과 문화평론서가 가득했다. “다 읽은 거야?”라는 질문에 “이것들이 여기에 자리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를 포지셔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고 에둘러 말했다. 솔직해서 좋다. 그리고 내가 속지 않아서 좋았다.

‘카무플라주’는 ‘보호색이나 형태를 통한 위장’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약육강식의 생태계에서 동식물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든가, 전쟁 중 야전전투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ㅁ과장의 데스크톱 위에 놓인 화장거울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데 10% 정도의 구실을 한다. 나머지 90%는 업무 외의 무엇인가를 할 때 후방에서 다가오는 ‘적’의 동태를 살피는 데 쓰인다. 적을 발견하면 ㅁ은 재빠르게 몇 개의 엑셀 창을 띄우고 위장에 돌입한다. 적은 ㅁ의 업무실력을 높이 산다. 나는 ㅁ에게 위장복을 선물하고 싶다. 화룡점정에 참여하고픈 본능적인 욕구랄까?

대통령 선거 과정과 결과를 통해 나는 직장인으로서 더 밀림 같은 세상, 좀더 전쟁 같은 삶을 준비해야 함을 짐작한다. 나를 포함한 1470만명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직장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정치적 색깔을 숨기는 위장을 해 나갈지도 모른다.

이 무렵 패션계가 내놓고 대중이 열광한 카무플라주라는 테마는 어찌나 시의적절하게 느껴지는지! 그런데 군복 무늬에 질릴 대로 질린 대부분의 대한민국 남성들은 어디로 숨어야 할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향후 5년간의 패션 트렌드가 자못 궁금해지는 데까지 이르렀다. 흰 셔츠에 다림질로 주름을 잡으며 더 꼿꼿하고 도도하게 살리라 다짐한다. 반복적으로 매는 넥타이 매듭에 유난히 힘이 들어간다. 올 한해도 고생 많았다.

글·일러스트레이션 H기업 이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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