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28일 새벽 강원 고성 대진항에서 물질을 위해 출항하는 해녀들. 물질 경력 20~50년의 70대 할머니들이 많다.
[매거진 esc] 여행
강원 고성 대진항과 화진포
강원 고성 대진항과 화진포
동해 바닷가 중에서도 남한 땅 북쪽 끝, 강원도 고성. 금강산 가던 길은 얼어붙은 채 막혀 있고, 바닷가 내려가는 길은 철조망에 걸려 잘린다. 푸른 파도 하얀 갈매기만 여전히 오고 가고 지껄이며 교통한다. 고성의 겨울바다를 보러 간 이유는 두 가지다. 강추위 속에 새벽 어둠을 밝히며 출항하는 동해 최북단 포구 대진항 어선들과, 새로 산 도화지처럼 펼쳐진 겨울 화진포 호수를 만나기 위해서다. 춥고 힘들어서, 애써 새해 새 희망 찾아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늘 어디 없나 하고 찾던 그 고즈넉하고 인적 드문 여행지, 그걸 만나러 가는 여정이었다. 대진항의 새벽은 어선을 밝힌 어민들 표정으로 환했고, 싸륵싸륵 눈 내려 쌓이는 화진포 호수와 바닷가는 오가는 이 드물어 한적했다.
동해안 최북단 대진항
고즈넉하고 인적 드물어
아침 어판장 경매도 볼만
대진항 새벽 3시30분. 잠들었던 배들이 하나둘 출렁이며 깨어나기 시작했다. 부둣가 여기저기 드럼통에 장작불이 피워지고, 배 엔진 시동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진항은 동해안 최북단 포구다. 크고 작은 어선 100여척에 관광객을 위한 활어회센터를 갖춘 아담한 포구다. 더 북쪽 바닷가 마을로 명파리와 마차진이 있지만, 이곳엔 포구도 없고 어선도 없다. 바닷가로 내려서는 길 자체를 철조망으로 막아놓고, 여름 피서철에만 잠깐 해변을 개방하는 마을이다.
“고기가 많아서 나가나? 있나 하고 가보는 거지.” “고기도 줄고 관광객도 줄고 돈벌이도 줄고, 뭐 늘어나는 게 있어야 재미가 나지.” 출어 준비를 하며 장작불에 언 몸을 녹이던 뱃사람들이 한마디씩 했다. “제철 맞은 고기? 요즘 철 맞춰 나오는 고기가 어디가 있나. 제멋대로 나오고 싶을 때 나오는 기지.” 30여년째 어선(송일호·3.23t)을 운영하는 김휘남(61)씨는 “옛날엔 철 따라 다른 고기들을 잡았는데, 요즘엔 통 종잡을 수가 없다”고 했다. “봄·여름 고기가 겨울에도 나오고, 겨울 고기가 가을에 나오다 끊기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지난가을엔 도루묵이 풍어를 이뤘지만 “개도 안 물어갈 정도로 값이 떨어져” 오히려 고기잡이를 포기할 정도였다고 했다. 고기잡이는 들쭉날쭉해도, 새벽 4시가 되자 대진항의 어선들은 줄지어 불을 밝히고 출어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혹시 좀 다르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있어서다.
옛 권력자들 별장
즐비한 화진포 호수
겨울엔 색다른 매력 포구 북쪽 끝 작은 배들에선, 또다른 분들이 출어 준비로 바빴다. 포구 부근 연안으로 물질을 떠나는 해녀들이다. 배에 설치된 화덕 위의 대형 솥에선 물이 끓고, 둘러앉은 해녀들은 몸을 녹이며 잠수복으로 갈아입었다. 20~50년씩 물질을 해온 70대 해녀 할머니들이다. “젊고 건강해 보인다”고 하자, “잠수복 입으니 젊어 보이지?” 하며 웃으신다. “늙었다고 집에 처앉아 있으면 뭐하겠나? 평생 해온 게 이건데.” “허리·다리 쑤셔도, 뜨끈한 파스 두어장 붙이면 거뜬하그덩.” “우린 돈 벌면서 수영하고 살 뺀다니까는. 호호.” 비좁은 갑판은 호호·깔깔 웃음소리로 덮여, 추위 따위는 들어설 틈이 없다. 대진항 해녀는 60여명. 50년 넘게 물질을 해온 80대 어르신도 있다. 여명이 번져오자, 문어·해삼·전복·성게 건져올 생각에 소녀처럼 들뜬 할머니들을 실은 배는 부릉 통통통 시동을 걸고 출항했다.
아침 7시가 넘자, 나갔던 배들이 하나둘씩 들어와 눈발 흩날리는 어판장에 고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널찍한 어판장에 비해 썰렁한 경매가 진행됐지만, 대구·곰치·도치·임연수어·광어·오징어… 어족들은 다양했다. 끝물인 도루묵도 한 무더기 나왔다. 겨울 바닷고기 가격은 늘 고공행진이다. 특히 요즘 해장국 재료로 인기 많은 곰치 등은 천정부지로 치솟을 때가 많다. 이날 곰치 4~5㎏짜리 입찰가는 마리당 5만원 안팎. 시장 거래값은 7만원대까지 올라간다. 대진수협 경매사 김낙기씨는 “잡히는 양이 줄고 찾는 이는 많은데다, 파도가 높아 출어 못하는 때도 잦으니 가격이 높게 형성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출출해진 포구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은 부두식당. 7시 반이면 어김없이 문을 여는 생선찌개 집이다. 뱃사람도 상인도, 경매 구경을 나온 관광객도 더운 김 훅 끼치는 식당 문을 열고 들어와 “어이구 따뜻하다”를 연발하며 언 몸을 녹인다. 포구 사람들은 여기서 주요 일과를 마무리하고, 관광객은 아침을 먹으며 하루 일정을 시작한다.
대진항에서 해변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차를 몰며 드라이브를 즐겨볼 만하다. 바닷가 쪽은 철책과 철조망 행렬이 이어진다. 바다는 철조망으로 막혔어도, 갈매기들 나대는 바위 자락에도 모래 해변에도 골고루 눈발이 흩날려 쌓인다. 해상의 광개토대왕릉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거북 모양의 작은 섬 금구도를 바라보며 초도항 지나 한 굽이 돌면 화진포다.
겨울 화진포는 피서객·단풍객 줄지어 찾아오는 여름·가을과는 뚜렷이 다르다. 해양박물관 지나 금강소나무숲 곁으로, 철새 한 점 날지 않는 호숫가에 마른 억새 줄기만 흔들리는, 눈 덮인 화진포 호수가 널찍한 백지 한 장을 눈앞에 들이민다. 뭐든 새로운 다짐 하나쯤 마음에 새기고 돌아서야 할 풍경인데 그냥 막막해져서, 하릴없이 호수 둘레길을 따라 한 바퀴 돌게 된다. 화진포 호숫가와 바닷가엔 옛 김일성 별장, 이승만 별장, 이기붕 별장 들이 들어서 있다. 건물 자체는 소박하지만, 주변 경관은 수려하다. 주로 사진 자료들이 전시된 옛 권력자들의 별장을 2000원짜리 티켓 한 장으로 둘러볼 수 있다.
눈발 날리는 화진포 바닷가 텅 빈 주차장에, 크고 작은 3개의 느낌표가 눈에 들어왔다. 눈 맞으며 깡충깡충 뛰는 아이와 젊은 부부. 엄마·아빠는 눈덩이를 굴려 눈사람을 만들고, 아이는 털모자를 벗어 눈사람에게 씌워주었다. 해마다 아이를 데리고 동해안 겨울 여행을 한다는 박선규(40)·오세희(32)씨 부부. “복잡하고 붐비는 곳을 싫어해서, 겨울 동해 바다 여행을 자주 해요. 조용해서 좋고 이렇게 눈까지 내리니 정말 환상적이네요.” 박씨 부부는 아이와 함께 눈 덮인 화진포 해변을 거닐었다. 셋이 손잡고 눈벌판을 걸어가자, 차가운 바람도 거센 파도도 따뜻한 그림 한 장을 완성하는 배경이 되어 뒤로 물러섰다.
고성=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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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하고 인적 드물어
아침 어판장 경매도 볼만
출항에 앞서 장작불을 피우고 몸을 녹이는 대진항 어부들.
즐비한 화진포 호수
겨울엔 색다른 매력 포구 북쪽 끝 작은 배들에선, 또다른 분들이 출어 준비로 바빴다. 포구 부근 연안으로 물질을 떠나는 해녀들이다. 배에 설치된 화덕 위의 대형 솥에선 물이 끓고, 둘러앉은 해녀들은 몸을 녹이며 잠수복으로 갈아입었다. 20~50년씩 물질을 해온 70대 해녀 할머니들이다. “젊고 건강해 보인다”고 하자, “잠수복 입으니 젊어 보이지?” 하며 웃으신다. “늙었다고 집에 처앉아 있으면 뭐하겠나? 평생 해온 게 이건데.” “허리·다리 쑤셔도, 뜨끈한 파스 두어장 붙이면 거뜬하그덩.” “우린 돈 벌면서 수영하고 살 뺀다니까는. 호호.” 비좁은 갑판은 호호·깔깔 웃음소리로 덮여, 추위 따위는 들어설 틈이 없다. 대진항 해녀는 60여명. 50년 넘게 물질을 해온 80대 어르신도 있다. 여명이 번져오자, 문어·해삼·전복·성게 건져올 생각에 소녀처럼 들뜬 할머니들을 실은 배는 부릉 통통통 시동을 걸고 출항했다.
한 가족이 싸락눈 내리는 화진포 바닷가를 산책하고 있다. 오른쪽 멀리 광개토대왕릉이란 이야기가 전해오는 금구도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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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화진포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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