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ESC

그녀는 젠장, 예뻤다

등록 2013-06-26 19:53수정 2013-07-24 10:18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매거진 esc] 혼자 어디까지 가봤니
기혼 여자사람의 싱글라이프는 생각했던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 이상 ‘알던 남자’들은 유부녀가 된 나를 뚜렷한 이유 없인 만나지 않을뿐더러, 여자친구란 것들은 뿔뿔이 결혼해 각자의 전쟁터에서 애 낳고 키우느라 안부를 묻기도 곤란해졌다. 월말부부인 내가 남편 없이 혼자 보내는 어느 주말 밤, 개콘 엔딩 음악으로 한 주를 날릴 순 없다며 호기롭게 집을 나섰다.

영화 <은교>. 책장 읽어 내려가듯 혼자여도 나쁘지 않으리. 혼자 영화보기의 좋은 점은 언제 어느 때든 1인 좌석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상영관 맨 뒷좌석을 향해 계단을 오르는 길에 낯익은 한 남자가 눈에 띈다. 내 오랜 옛 애인이 거기 앉아 있었다. 혼자가 아닌 커플로 말이다. 한때는 함께 결혼을 꿈꾸기도 했지만 이제 와 주절거려 봤자 죽은 아이 고추 만지기일 뿐이다. 서로의 결혼식을 가지 않았으므로 막연히 실체는 없었던 상대방 배우자의 존재를 맞닥뜨린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진짜 결별은 지금 진행중이다.

그들 역시 나와 한동네에 산다는 소문을 듣고선 혹시 신랑 없이 홀로 장을 볼 때 다정하게 카트를 미는 그 부부를 마주칠지 모른단 불길한 예감이 있긴 했다. 그러나 하필 고무줄 치마와 왱왱이 안경을 풀장착한 오늘 밤 여기 6번 상영관에서일 줄이야. 유일하게 다행한 점은 그는 나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9천원짜리 떡 사먹었다 치고 그냥 집에 가버릴까.’ 복잡한 내적 갈등이 유보된 두 시간 동안 영화는 아름다웠다. 은교를 바라보는 이적요의 세밀하고도 집요한 시선을 대하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문득 저 앞의 두 남녀를 훔쳐보고 싶은 내 관음 욕구도 뻔뻔하게 정당한 권리로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엔딩크레디트가 오르기 시작하자마자 빛의 속도로 내 이성은 조급해진다. ‘지금 빨리 내려가 볼까? 그렇지 않으면 난 죽을 때까지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길이 없어. 어떤 여잔지 너무 궁금하다고! 하지만 그러다 내가 발각되면 그 망신은?’ 호기심과 두려움의 대차대조표가 급해졌다.

작은 키를 무기 삼아 요리조리 몸을 숨기며 적당한 기둥에 숨어 훔쳐보는 데 성공했다. 허리부터 발목까지 내려오는 블루 맥시 롱스커트가 잘 어울리는 그녀는, 젠장 예.뻤.다. 아담한 나와는 전혀 다른 타입의 키가 큰 늘씬한 여인. 도대체 뭘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그녀가 미인이 아니길?

자정을 훌쩍 넘은 시각, 돌아오는 길은 안심되면서도 허전했다. 언젠간 누군가에게, 어딘가에 꼭 털어놓고 싶었다. 그때의 분한 마음을, 적막했던 시간을 가득 메운 폭풍 상념들을, 그리고 완전 범죄에 가까운 오늘의 숨막히는 심야 추격전을. 이적요의 입을 빌리면 그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랬다. “너희의 지금 그 오붓함이 상이 아니듯, 오늘 밤 나의 찌질함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은 아니리라.”

공세현 씨제이(CJ)오쇼핑 프로듀서

<한겨레 인기기사>

[단독] ‘전두환 비자금’ 조력자, 압수수색 전날 ‘야간 이사’
[단독] 전두환 장남 전재국, 출판사 고액 해외 판권으로 재산 빼돌린 의혹
NLL 논란 끝내고 싶은데…더 커지는 ‘문재인 책임론’
센서가 알아서 척척…김여사 주차 고민 해결 눈앞
[화보] “로열 베이비 나셨네”…영국 전역이 들썩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ESC 많이 보는 기사

70년간 갈비 구우며 신화가 된 요리사, 명복을 빕니다 1.

70년간 갈비 구우며 신화가 된 요리사, 명복을 빕니다

만찢남 “식당 창업? 지금은 하지 마세요, 그래도 하고 싶다면…” 2.

만찢남 “식당 창업? 지금은 하지 마세요, 그래도 하고 싶다면…”

내가 만들고 색칠한 피규어로 ‘손맛’ 나는 게임을 3.

내가 만들고 색칠한 피규어로 ‘손맛’ 나는 게임을

히말라야 트레킹, 일주일 휴가로 가능…코스 딱 알려드림 [ESC] 4.

히말라야 트레킹, 일주일 휴가로 가능…코스 딱 알려드림 [ESC]

새벽 안개 헤치며 달리다간 ‘몸 상할라’ 5.

새벽 안개 헤치며 달리다간 ‘몸 상할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