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ESC

할 도리는 안 하면서 착한 척하기는

등록 2013-08-07 18:56수정 2013-08-30 16:45

이대리 제공
이대리 제공
이 대리의 ‘직장생태 보고서’
얼마 전 회사가 진행하는 큰 행사의 입찰 진행을 맡았다. 세 업체의 실무자들을 모아 사전 설명회를 열고 관련 자료를 나눠준 뒤 4주 뒤에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한다고 통보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4주 동안 각 대행사는 나름대로 최선의 제안서를 만들기 위해 담당자인 내게 많은 질문과 추가 자료 요청을 했고, 약속된 날 결기 어린 눈빛을 하고 모여들었다.

사내에서 관련 업무를 경험해본 7명이 심사위원석에 앉았다. 각자에게 배정된 발표시간과 약간의 휴식시간이 지나고 내 손에는 평가표 7장이 쥐어졌다. ‘안타까움’이라는 불필요한 인간미를 가미하지 않기 위해 엑셀 시트에 건조하게 점수를 입력해 나갔지만, 선택되지 못한 두 팀에는 ‘미안함’이 앞섰다. 회사 내부적으로 이런 유의 입찰에 ‘리젝트피’(Reject fee)를 지급한 바 없기 때문이다.

업계에서 통용되는 용어인 ‘리젝트피’를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거절 수수료’쯤 될까? 그 의미는 입찰에 참여한 회사들에 지급하는 소정의 실비 보전 혹은 수고료 정도 될 것이다.

다음날 두 업체에 탈락 통보를 하려고 집어든 수화기는 천근만근처럼 느껴졌다. “김 부장님, 죄송한 말씀 전합니다. 열심히 준비해주신 것 잘 알겠는데 간발의 차로 A업체가 선정됐네요”, “서 이사님, 제 맘 같아선 바로 계약서 쓰고 싶었는데 심사위원들이 여러 명이다 보니 의견이 이렇게도 모이네요. A업체랑 하게 됐습니다”라고 운을 뗀 나는 “리젝트피도 챙겨드리지 못해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다른 인연으로 함께 일하길 바랍니다”라는 공통된 문장으로 두 통화를 끝냈다.

며칠 뒤 선정된 A업체 실무진과의 만남이 있었다. 내내 꺼림칙했던 마음에 “경쟁 프레젠테이션 참가하시고 떨어졌을 때 리젝트피를 챙겨주는 곳은 몇 퍼센트 정도인가요?”라고 물었다. 20년간 행사대행업에 종사한 A업체 ㅈ이사는 “일부 공공기관에서 아이디어 도용에 대한 시비를 막기 위해 탈락한 제안서를 저작권료 지급 개념으로 구입하기도 하지만 그 금액이 실비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고, 그나마 사기업에서는 거의 기대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설명인즉슨 대형 이벤트일수록 수요처는 한정되어 있고, ‘그 바닥’에서 안 좋은 소문이라도 나면 일감이 뚝뚝 떨어지기 때문이란다. 이어서 그는 “어떤 기업이 나서서 리젝트피 지급을 관례화해봤자 ‘좋은 기업인 척하는구나’라는 반응만 나올 뿐 산업계에 자발적으로 확산되진 않을 거예요”라고 덧붙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무형의 상품을 판매하고 있는 지식서비스 판매자들은 그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바랄 일과 바라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짓고 있었다. 짐작건대 그들이 받지 못한 정당한 보수는 입찰에 성공한 뒤 계량화할 수 있는 항목들로 변신해 ‘질량 보존의 법칙’을 증명해 나갈 것이다. 서비스를 요청한 기업 입장에서 봐도 이건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형국인데 누구도 이 피곤한 반복행위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만일 2014년 예산 편성 요구안에 ‘리젝트피’ 항목을 신설하자고 나서면 나는 ‘우수사원’이 될까, ‘돈키호테’가 될까?

따지고 보니 리젝트피도 안 주는 회사들인 주제에 사회공헌 사업은 저마다 하고 있다. 선(善)함은 풍년이고 도리(道理)는 흉년이다. 그 풍년도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H기업 이대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ESC 많이 보는 기사

70년간 갈비 구우며 신화가 된 요리사, 명복을 빕니다 1.

70년간 갈비 구우며 신화가 된 요리사, 명복을 빕니다

만찢남 “식당 창업? 지금은 하지 마세요, 그래도 하고 싶다면…” 2.

만찢남 “식당 창업? 지금은 하지 마세요, 그래도 하고 싶다면…”

내가 만들고 색칠한 피규어로 ‘손맛’ 나는 게임을 3.

내가 만들고 색칠한 피규어로 ‘손맛’ 나는 게임을

히말라야 트레킹, 일주일 휴가로 가능…코스 딱 알려드림 [ESC] 4.

히말라야 트레킹, 일주일 휴가로 가능…코스 딱 알려드림 [ESC]

새벽 안개 헤치며 달리다간 ‘몸 상할라’ 5.

새벽 안개 헤치며 달리다간 ‘몸 상할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