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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클래식이라 부르노라, ‘럼버 잭 셔츠’

등록 2013-09-25 19:49수정 2013-09-26 13:45

남현지 제공
남현지 제공
[매거진 esc] 시계태엽 패션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한다. 성경의 내용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패션에서도 과거와 단절된 채 그 스스로 새롭게 탄생한 것은 없고 어떤 아이템이든 과거와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다. 시대 속으로 사라지는 옷은 없으며 단지 더욱더 다른 모양으로 발전해 나간다. 뻔한 이야기지만, 패션은 동시대를 가장 잘 반영하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옷만 하더라도 화수분처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마구 쏟아낼 수 있다.

별 볼 일 없는 나의 빨간색 체크셔츠가 더 좋아진 것도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다. 빨간색과 검은색이 격자무늬로 섞인 셔츠인데, 부드러운 울 소재에 간단한 ‘컬러 블로킹’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기본 중의 기본 디자인으로, 언제부터 우리 주변에 이런 디자인이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익숙한 옷이다. 사진의 옷은 대학교에 입학한 해, 명동의 포에버21에서 샀다. 밴드부 오디션을 볼 때 늘어뜨려진 치마와 같이 입고 갔는데, 그런지 음악과 룩의 대표 아이콘 커트 코베인까지는 아니었지만 닥터마틴까지 착용하여 나름 밴드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내기 적당한 차림새였다.

빨간색과 검은색의 격자무늬로 이루어진 이 셔츠는 ‘플래드(plaid: 격자무늬) 셔츠’의 종류에서도 ‘럼버 잭 셔츠’(lumber jack shirt)라 불리는 디자인이다. ‘럼버 잭’은 수십년 전 전기톱이 없던 시절, 도끼로 직접 나무를 베던 벌목꾼을 의미한다. 캐나다나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 벌목꾼들은 추위를 견딜 수 있도록 울을 압축한 소재인 플란넬로 된 럼버 잭 셔츠를 입었다. 원래 플란넬은 양털로 만들어져 비싼 옷이었지만, 이후 저렴한 면으로 만든 플란넬이 개발되었다. 가볍고 부드러우며 따뜻하기까지 해서 매우 실용적인 원단이다. 셔츠에 서로 대비되는 단색의 조합을 사용한 것은 야외에서 일할 때 가시성을 높이기 위함과 쉽게 때가 타지 않게 하려는 이유에서였다. 체크무늬는 염색한 실을 직조하거나, 원단에 안료를 찍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사실 사진의 체크무늬만 럼버 잭 셔츠라고 불리는 것은 아니다. 그 어원은 미국의 회사 펜들턴이 만든 여러 종류의 체크셔츠가 유명해지면서, 울 소재로 만들어진 다양한 체크셔츠는 이후 럼버 잭 셔츠로 통칭하게 되었다. 초기의 셔츠들은 기능성을 위주로 한 제품들이었고, 대부분 회색인데다 무늬가 없었다. 벌목꾼 등이 입었던 전형적인 블루칼라 노동자를 연상시키는 큼지막한 플래드 패턴이 만들어지게 된 데는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그룹 비치 보이스가 럼버 잭 셔츠를 입은 공도 컸다. 펜들턴 셔츠는 튼튼한 야외 작업복에도, 편안한 주말의 옷에도 어울렸다.

럼버 잭 셔츠와 같이 오랜 시간 사랑을 받아온 옷이 진정한 클래식이다. 유명한 디자이너가 만든 것도, 비싼 원단을 사용한 것도 아니지만 겹겹이 쌓인 세월의 단면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 눈에 보이는 형태, 즉 색이나 선이 이루는 것을 넘어 2차적인 이야기-문화적, 관습적, 역사적인 요소-를 알면 알수록 뻔했던 디자인이 여러 차원의 의미를 가진다. 옷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는 시대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되며, 흔한 디자인에 담긴 다층적인 의미를 알게 되면 만원짜리 옷이라도 쉬이 지나칠 수 없게 된다.

남현지 디어매거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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