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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라야 제발 나타나라

등록 2013-10-09 20:44수정 2013-10-10 11:46

최명애 제공
최명애 제공
[매거진 esc] 수상한 북극

알래스카 페어뱅크스
나는 오로라와 좀처럼 인연이 없었다. 오로라가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위해 짜잔 하고 나타나줄 것도 아니고 - 여행하는 우리들은 나의 특별한 하루를 위해 온 우주가 움직여줄 것이라고 멋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설마 그럴 리가. 내가 들인 정성과 돈과 시간을 생각하면 밤마다 오로라가 나타나 춤을 춰도 시원찮겠지만, 오로라는커녕 만날 춥고 바람 불고 비가 왔다. 나의 소박한 소원은 언제나, 비만 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계절도 문제였다. ‘밤’이 되어야 오로라가 보일 것 아닌가. 그러나 내가 여행하는 여름의 북극권은 좀처럼 해가 지지 않았다. 해가 일찍 떨어져도 밤 10시, 새벽 3~4시면 이미 밖이 훤했다. 아예 24시간 해가 지지 않는 곳도 있었다. 백야도 한두 번이지, 오로라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겨울에, 그것도 오로라가 제일 잘 보인다는 1월 말에, 세계에서 오로라가 제일 잘 보인다는 캐나다 북부의 옐로나이프에 가는 방법이 있긴 했다. 그러나 회사는 좀처럼 ‘겨울휴가’를 주지 않았다. 주더라도, 이미 뻔뻔하게 여름휴가 때 앞뒤 주말 다 붙여서 열흘 놀다 왔기 때문에 차마 입도 떨어지지 않았다.

주어진 조건의 열악함 속에서도 내가, 오로라를 보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일단 오로라가 나타나라고 열심히 빌었고, 박물관이나 인포메이션 센터에 갈 때마다 오로라의 ‘오’ 자라도 있는지 열심히 찾아봤다. ‘오로라 예보’ 사이트도 틈틈이 봤다. 날씨 예보 하듯이 한 주의 오로라 상황을 예보하는 사이트가 있다. 오로라 활동 정도를 0에서 9까지로 구분하는데, 0은 미약, 9는 최강이다. 이게 무슨 오로라 관광협회 같은 데서 대충 찍어서 알려주는 게 아니다. 알래스카 페어뱅크스대학의 과학자들이 운영하는 사이트(www.gi.alaska.edu/AuroraForecast)다. 내가 남말 할 처지는 못 되지만 세상에 이상한 사람 참 많다.

지금 막 찾아보니 2013년 9월29일 오늘의 알래스카 오로라 활동 정도는 ‘3’. ‘중간’ 정도란다. 우리가 페어뱅크스에 도착했던 8월 말에도 오로라 예보는 ‘중간’이었다. 여행자 인포메이션 센터의 ‘오로라 예보 상황판’에 그렇게 붙어 있었다. ‘잘하면 볼 수도 있겠다’ 정도. 그 말에 마음을 의지하고, 해가 지는 한밤중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마을의 불빛이 보이지 않는 언덕 위로 올라갔다. 북쪽을 향해 차를 세워놓고, 오로라가 나타나시기를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옛날 알래스카 사람들은 오로라가 나타나면 지금 막 세상을 떠난 이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라고 믿었단다. 저 멀리 핀란드 북부의 라프족들은 오로라가 여우 꼬리의 깃털이 눈가루 위에 떨어지는 것이라고 믿었단다. 일본 사람들은 신혼부부가 오로라를 보면 천재를 낳는다고 믿는단다. 그렇다면 알래스카 어린이들은 상당수 천재로 태어나야 되는 것 아닌가.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오로라를 처음 본 것은 아이슬란드 서쪽의 조그만 시골마을에서였다. 저녁을 먹고 잠시 졸았다 한밤중에 깨어났는데, 북쪽 하늘에 희뿌연 구름 덩어리가 보였다. 오로라 예보가 ‘중간’이라고 했던 그날, 나를 찾아온 것은 초록색의, 긴 띠처럼 보이는, 깃털 같은 오로라였다. 나는 아마도 천재를 낳을 것이다.

최명애 <북극 여행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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