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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커 변신은 주말 기차에서

등록 2013-10-16 20:17수정 2013-10-17 11:36

김소민 제공
김소민 제공
[매거진 esc] 김소민의 타향살이
집이 살아있다. 눈 깜짝할 사이, 똥 무더기를 싼다. 일어난 각질처럼 먼지가 구석구석 허옇다. 돌봐주지 않았더니 빈 병들을 도열해 시위중이다. 집이 감염되기 전에 시중들기로 했다. 골동품이 다 된 병 무더기를 버리려고 챙겨 나서는데, 함께 사는 독일인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가로막는다. “일요일엔 병 버리면 안 돼.” 신이 노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독일에서 병 분리수거는 색깔별로 한다. 갈색, 투명, 초록색을 컨테이너 같은 철제 통에 뚫린 각각 다른 구멍에 떨어뜨린다. 구멍과 바닥 사이가 꽤 멀어 병을 넣으면 쨍그랑 깨지는데 독일인이 가로막은 까닭은 그 소리 탓이다. 일요일엔 사람들이 쉬어야 하니 방해해선 안 된다는 거다.

처음 이 집으로 이사 온 날 저녁 7시쯤 3층으로 낑낑거리며 짐을 옮기는데 도와주던 독일인이 태클을 건다. “발끝으로 걸어. 소리 안 나게.” 이웃들 귀에 내장돼 있을 것 같은 특수보청기를 빼주고 싶었다.

저녁이나 주말은 그렇다 치자. 낮에도 집에서 조용해야 할 시간대가 있다. 오후 1시부터 3시까지다. 옆집 사람이 낮잠 잘 수도 있다는 거다. 콜롬비아인 후안은 이 시간대에 기타를 쳤는데 곧 분노의 드럼 소리가 합류했다. 아래층에서 빗자루로 천장을 쾅쾅 쳐댄 거다.

그런데 신기하게 작은 소음에도 뇌 파열이라도 일으킬 것처럼 굴던 사람들이 유독 주말 기차에서는 돌변한다. 특히 도심과 외곽이 연결되는 기차는 그동안 억눌렸던 소음 유발 충동을 경쟁적으로 발현하는 장 같다. 맥주 병나발은 이 경연장에 빠질 수 없는 소품이다. 지난 11일 밤 11시께 쾰른에서 본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 40대 남녀 네댓명이 불콰했다. 음담패설을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 후보 연설처럼 고래고래 해대는데 자기가 한 말에 스스로 터뜨린 폭소가 화통하니 장군감이다. 안 들으려 해도 안 들을 수 없다 보니 일행이 아닌 사람도 피식거리기 시작했다. 썰렁한 농담이 지겨웠는지 내 뒷자리 청년이 음악으로 맞불을 놓는데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다. 볼륨이 어찌나 빵빵한지 그 청년 손을 잡고 덩실덩실 춤이라도 춰야 할 것 같다. 여기는 대체 어디일까. 노가리 안주라도 시켜야 하는 건가.

김소민 <한겨레> 편집부
김소민 <한겨레> 편집부

이 소음경연장의 절대 강자, 불패 신화의 주인공은 축구팬들이다. 지난 5일 본에서 뒤셀도르프로 가는 기차 안, 오전 10시께인데 초록색 티셔츠를 맞춰 입은 예닐곱 청년들의 낯빛은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코끝까지 불그스레한 게 벌써 한명당 맥주 댓 병은 끝낸 거 같다. 이 무리는 기차가 출발하기 무섭게 목젖이 보이도록 응원가를 불러 젖혔다. 너무 즐거워, 그들의 즐거움이 해일처럼 다른 승객들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걸 까맣게 모르는 천진한 표정들이다. 내 곁에 있던 커플은 이 와중에 대화를 시도하는데 축구팬들의 고성방가를 뚫고 나와야 하니 내뱉는 낱말마다 데시벨이 올라간다. “마르크스가 누구야?” “글쎄. 공산주의랑 관계 있는 사람 같아.” “정치가야?” “그런 거 같은데.” 왜 입, 눈 다 닫히는데 귀는 안 닫히는 걸까. 4차원 대화와 응원가가 함께 귓구멍 안으로 돌격하니 속절없이 무장해제 되는 수밖에 없다. 이럴 때면 한번 따라가 보고 싶다. 이들도 내일이 되면 까칠한 고막의 주인들로 돌변해 있으려나?

김소민 <한겨레>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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