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2일 토요일 오후 6시부터 서울 상암 월드컵공원 평화광장에서 열린 ‘에너자이저 나이트레이스 2013’에 참가한 1만여명의 참가자들이 헤드랜턴을 켜고 달리는 장관을 연출했다. 사진 ㈜에너자이저코리아 제공
[esc] 라이프
보스턴 마라톤 대회 출전을 꿈꾸는 시인 이우성의 가을 달리기 대회 순례기
보스턴 마라톤 대회 출전을 꿈꾸는 시인 이우성의 가을 달리기 대회 순례기
텔레비전으로 보스턴 마라톤 대회 테러 현장을 보면서 결심은 확고해졌다. 내년엔 간다, 보스턴! ‘뛰지 않을 거면 왜 살아 있어’는 좌우명까진 아니지만 내게 꽤 영향을 미치는 문장이긴 하다. 뛸 때 나는 가능성을 느낀다. 뛰는 행위는 크고 작은 많은 벽을 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뛰는 것만으로, 의심할 바 없이 누구나 자신이 기어코 무엇이든 더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굳이 사족을 달자면 나폴레옹은 말했다. “다른 사람이 감히 생각지도 못하고 있을 때 내가 해야 할 말과 해야 할 일이 떠오르는 것은 천재성이 아니라 깊은 명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내게 ‘뛴다’와 ‘명상’은 동의어다.
그래서 연습 중이다. 보스턴에 가려고. 테러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의 의지를 보여주려고. 일단 이번 가을의 목표는 10㎞를 한 시간 안에 무난하게 들어오는 것이다. 물론 10㎞는 뛸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건 뛰고 난 뒤의 상태다. 풀코스에 몇 번 도전했고 실패도 했고 성공도 했는데 돌아보면 언제나 처음 10㎞에 많은 것이 결정됐다. 호흡과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고 10㎞를 뛸 수 있으면 42.195㎞도 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뭐, 확인되진 않았다.
10월의 밤은 빨리 찾아온다
클럽 조명처럼 수천개
헤드랜턴이 빛을 뿜었다
뛰는 동안 바람의 온도와
내 체온이 비슷해진 것 같았다 그래서 풀코스나 하프코스가 없는 작은 규모의 러닝 대회에 참가하고 있다. 풀코스가 있는 대회에서 5㎞나 10㎞를 뛰면, 풀코스 뛰는 아저씨들한테 기죽으니까. 지난 9월 스포츠용품 회사 푸마에서 주최한 ‘나이트 런’을 뛰었다. 참가자들이 모두 7㎞를 뛰는 평등한 대회였다. 저녁 7시에 레이스가 시작됐는데 깜깜하진 않았다. 나이트 런은 대부분 초저녁 레이스에 가까웠다. 장소가 경기도 과천에 있는 서울대공원이었기 때문에 풀빛이 온통 예뻤다. 가늘게 빗방울도 떨어졌다. 깜깜했으면 그 풍경을 못 볼 뻔했다. 코스 가로 폭이 좁아서 거의 걸어야 했다는 게 아쉬웠다. 하지만 그 모든 상황이 레이스라고 생각한다. 상쾌해서 몸의 세포들이 다 흩어질 것만 같았다.
가을은 달리기의 계절이다. 여러 스포츠 회사들이 경쟁적으로 레이스를 열고 있다. 장차 보스턴 마라톤 대회를 뛸 사람으로서 밤에 뛰는 레이스에 몇 번 참가했는데 어떨 땐 별로 어둡지 않고 어떨 땐 너무 어두웠다. 별로 어둡지 않을 땐 낮에 뛰는 것과 다르지 않아서 시시했고 너무 어두울 땐, ‘아, 뛰다가 사고 나서 죽으라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참가자들과 부딪혀서 넘어진 적도 있다.
지난 10월12일엔 건전지 회사가 주최한 ‘에너자이저 나이트레이스’를 뛰었다. 10㎞에 참가했다. 하지만 레이스를 며칠 앞두고 심각하게 갈등했다. 왜냐하면 그날 저녁 8시에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이 브라질과 평가전을 치르기 때문이었다. 브라질 경기의 1등석 티켓을 두 장이나 선물받았다. 게다가 솔직하게 적자면 ‘에너자이저 나이트레이스’에는 기대하는 게 없었다. 이 레이스는 이번이 다섯번째다. 한국에서 나이트레이스를 가장 먼저 시작했지만 어떻게 이렇게 유명하지 않을 수가 있지? 팔굽혀펴기를 백만 스물하나나 하는 회사지만 달리기족들 사이에선 별 소문이 없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는 레이스에 참가했다. 브라질과의 경기라면 내가 보든 보지 않든 질 게 뻔하지만, 내가 대회에 참가하지 않으면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까지 지는 거니까. 역시 나는 근성이 있는 놈이었다.
토요일 저녁 7시에 상암에 갔다. 길 건너 월드컵 경기장에서 내가 좋아하는 이청용과 네이마르가 몸을 풀고 있을 그 시간 나는 상암 월드컵 공원 평화광장에서 몸을 풀었다. 골인지점이 축구장이면 좋겠다, 속엣말을 하면서. 7시30분 헤드랜턴을 켠 사람들이 출발점에서 뛰쳐나갔다.
헤드랜턴! 그렇다, 이게 중요하다. 10월의 밤은 빨리 찾아온다. 에너자이저 코리아에선 참가자들에게 헤드랜턴을 나눠준다. 헤드랜턴을 착용하고 달린 건 처음인데 인상적이었다. 수천개의 헤드랜턴이 빛을 뿜는 모습은 사람을 흥분시켰다. 특히 레이스 초반엔 클럽 천장에서 총알처럼 쏴대는 조명 같았다. 춤을 춰야 할 것 같아서 멈춰서 춤을 췄더니 나를 지나쳐간 참가자 몇 명이 뒤돌아봤다. 눈이 부셨다. 헤드랜턴을 착용하고 달릴 땐 뒤를 돌아봐선 안 된다. 그런데 그때 그 사람들이 이 글을 읽으면 그 정신 나간 댄서가 나였는지 알겠군.
알아도 상관없지만 조금 아쉬운 건 여자 참가자들 때문이다. 미인이 많았다. 밤에 열리는 러닝 대회에 참가할 정도면 평소에 뜀박질 좀 한다는 건데, 그래서 그런지 다들, 아니 대체로, 아니, 몇몇은, 몸매가 훌륭했다. 그중 몇몇은 쓸데없이 토요일 밤에 남자친구와 함께 참가하고 있었다. 운동을 할 땐 운동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행인지 잘 모르겠지만 적당히 어둡고 적당히 밝아서 남자 참가자도 여자 참가자도 예뻐 보였다. 달리는 건 사실 조금 지루한 일이기도 해서 눈요기할 게 있어야 한다. 헤드랜턴이 빚어내는 괜찮은 레이스였다.
하지만 일종의 ‘병목 현상’은 여러 레이스를 참가할 때마다 공통적으로 느끼는 아쉬움이다. 그러려니 하고 뛰기는 하는데 어떤 대회는 5㎞나 10㎞를 완주할 때까지 목이 조인 상태가 계속되기도 한다. 에너자이저 나이트레이스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종종 그냥 걸어버릴까, 생각했다. 다행히 한강의 밤공기는 달았다. 헤드랜턴이 쏘아대는 빛과 빛 사이로 나는 물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달렸다. 친구들에게 사진을 찍어 보낼까 하다 그만두었다. 불빛이 지나갈 때마다 드러났다 사라지는 풀들이 예뻤기 때문이다. 보고 또 보고 또 보며 달렸다.
출발선에서 몸을 풀 땐 쌀쌀했는데 뛰는 동안에는 바람의 온도와 내 체온이 비슷해진 것 같았다. 그리고 달릴 때의 내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여자들이 ‘저 남자 귀엽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피니시 라인에 설치된 시계를 보니 1시간7분25초가 내 기록이었다. 이래선 내년에 보스턴까지 못 달려갈 텐데 하는 생각을 1초 정도 하고 있는데 브라질과의 평가전 상황이 궁금해졌다. 스마트폰을 꺼내 중계 영상을 켜자마자 네이마르가 찬 공이 한국 편 골대로 우아하고 느리게 들어가고 있었다. 전반전 하이라이트였다. 그래, 잘했다. 뛰기를 잘했다.
11월17일에는 ‘나이키 위 런 서울 10K’가 열린다. 10월28일에 온라인 접수를 한다고 한다. 일요일 오후 3시부터 뛰기 시작한다니까 늦잠 자는 사람들도 참가할 수 있다.
이우성/시인, <아레나 옴므 플러스> 기자
클럽 조명처럼 수천개
헤드랜턴이 빛을 뿜었다
뛰는 동안 바람의 온도와
내 체온이 비슷해진 것 같았다 그래서 풀코스나 하프코스가 없는 작은 규모의 러닝 대회에 참가하고 있다. 풀코스가 있는 대회에서 5㎞나 10㎞를 뛰면, 풀코스 뛰는 아저씨들한테 기죽으니까. 지난 9월 스포츠용품 회사 푸마에서 주최한 ‘나이트 런’을 뛰었다. 참가자들이 모두 7㎞를 뛰는 평등한 대회였다. 저녁 7시에 레이스가 시작됐는데 깜깜하진 않았다. 나이트 런은 대부분 초저녁 레이스에 가까웠다. 장소가 경기도 과천에 있는 서울대공원이었기 때문에 풀빛이 온통 예뻤다. 가늘게 빗방울도 떨어졌다. 깜깜했으면 그 풍경을 못 볼 뻔했다. 코스 가로 폭이 좁아서 거의 걸어야 했다는 게 아쉬웠다. 하지만 그 모든 상황이 레이스라고 생각한다. 상쾌해서 몸의 세포들이 다 흩어질 것만 같았다.
직장인 한선영, 황광선씨는 야간 달리기에 푹 빠져 야간 마라톤 대회에도 참석했단다. 사진 ㈜에너자이저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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