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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거미 리포트

등록 2013-12-11 20:13수정 2013-12-12 13:33

[매거진 esc] 혼자 어디까지 가봤니
바야흐로 독거인들의 혹독한 생존 기간, 연말연시가 가까워졌다. ‘야매’ 싱글녀인 필자는 자연스레 주위의 ‘혼자녀’ ‘혼자남’들과의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언제고 각자의 고충을 토로하며 상부상조할 수 있는, 이를테면 독거인들의 비상연락망이다.

가장 가까운 혼자남은 다름 아닌 ‘남편’이란 작자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마누라를 독거녀로 만든 장본인 역시 독거남인 것은 당연지사. 그는 스무살 때부터 기숙학교를 다니고 20대의 절반은 타국에서의 유학 생활로 다져진 혼자 살기 고수, 내공 9단의 혼자남이다. 그는 혼자 사는 삶에 대해 “배고픔과 추위와 외로움, 이 3가지는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다”고 유학 생활 당시를 회고한다. 떠듬떠듬 혼자 익힌 기타로 노래를 부르며 적적한 시간을 달래온 그는 급기야 셀프 작곡도 어느 정도 가능해질 수준에 이르렀다. 요리도 제법 늘었다. 혼자여도 위축되지 말고 적극적이지 않는 이상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미래의 혼자남·혼자녀들에게 충고까지 한다.

대기업 대리인 김묘길(30)씨는 올해 초 부모님 집에서 나와 출퇴근하기 편한 역세권 오피스텔에 둥지를 틀었다. ‘독거는 곧 궁상이다’라고 정의하는 그녀는 밤이면 전기장판과 온열기에 지친 육신을 누인다. 늘 엄마가 데워놓은 온기 가득한 집에서 살다가, 싸늘한 빈집으로 들어서는 그 서늘함. 그녀는 최근 소일거리로 퍼즐을 샀다. 애인과의 통화도 멀리 저편에서 들려오는 음성일 뿐, 내 손에 잡히는 실체로서의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심야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께 전단지를 끼기 위해 현관문을 잡아당기는 소리에 심장이 멎을 듯이 깜짝 놀랐다는 독거 초보 그녀에게, 혼자 있는데 현관 센서등 켜져본 적 없으면 말을 하지 말라며 너스레를 떨게 된 나는 제법 베테랑이 다 되었다.

또다른 DKNY(독거노인) 임형빈(36)씨는 최근 멀쩡히 잘 다니던 직장을 과감히 때려치우고 유럽으로 떠났다. 아주 늦은 밤, 동시간대의 사람들에겐 민폐일 어느 시점에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끼리는 미안해할 필요 없이 연락할 수 있다. 서로의 비상연락망에 등재되어 있는 이유다.

한 방송사 피디 김지선(31)씨의 자취 라이프는 스무살 때부터다. 드로잉으로 외로움을 달래는 게 습관이 됐다. 낙서처럼 혼자 끄적대던 그림들로 얼마 전엔 작은 전시도 치렀다. 그녀는 혼자 사는 이를 일컫는 ‘독거미’란 단어의 창시자이기도 한데, “언니도 독거미 돋네~”라는 그녀의 재기충만한 에스엔에스(SNS) 댓글을 처음 접했을 때 무릎을 쳤다. 독거미라니. ‘혼자 사는(獨居) 아름다움(美)’이란 뜻이구나. 그런데 알고 보니 어이없게도 ‘독거 미녀’(독거+미녀) 혹은 ‘독거 미남’(독거+미남)의 줄임말이란다. 그녀는 애인도 없이 혼자 사는 삶에 지쳐 현재 지금은 오랜 친구를 룸메이트로 맞아 함께 동거 생활을 하고 있다. 꼭 결혼 생활이 아니더라도, 타인과의 공동체 생활은 굉장한 도전정신을 요한다. 제법 기특하게 그들만의 규범과 룰을 확립해가며 아직까지 알콩달콩 살고 있다.

찬바람이 불면 독거미들이 술렁인다. 연말연시 고독이 예상된다. 각기 다른 모습, 다른 이유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 모두는 춥다. 모쪼록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기를. 건투를 빈다.

그림 김지선 피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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