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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창 토끼굴 들락거리던 시절’

등록 2014-04-09 19:42수정 2014-04-10 15:51

사진 강백수 제공
사진 강백수 제공
[매거진 esc] 백수의 청춘식탁
본가에서 나와 살게 된 지 어느덧 6개월. 처음보다 나아진 점들은 혼자 살아가는 방법을 익혔다는 점뿐이 아니다. 새로운 동네에 단골집이 많이 생기며 생활이 한층 더 풍요로워진 기분이다.

배달 애플리케이션으로 매일 시켜 먹던 밥집이 바로 옆 건물에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주소를 말하지 않아도, “안녕하세요! 오늘은 김치볶음밥이요!” 정도의 말만으로도 음식을 주문할 수 있게 되었다. 가끔 배달원이 거스름돈을 잊어도 편하게 다음에 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신뢰도 생겼다.

단골 밥집 외에도 단골 세탁소, 단골 철물점, 단골 기타가게 등 익숙한 공간은 많이 늘어났지만, 가장 갖고 싶었던 단골집은 뭐니 뭐니 해도 단골 바다. 혼자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외로운 일이다. 늦은 밤 외로워질 때면 언제나 익숙한 얼굴들을 만나고, 때로는 낯선 사람과도 격 없이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을 덥힐 수 있는 편한 공간 말이다. 그리고 너무나도 운 좋게, 나는 그런 곳을 찾았다. 바로 서교동 한쪽에 있는 작은 바, ‘토끼굴’.

새 기타를 자랑하고 싶을 때, 연애사업이 잘 되지 않을 때, 그냥 시간이 남을 때, 잠이 오지 않을 때 나는 토끼굴을 찾는다. 그곳에는 이제 친누나, 형 같은 사장 누나 커플과 나처럼 적적한 친구들이 언제나 기다란 바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서로 일부러 전화번호를 교환하지 않아도 그곳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사이는 생각보다 낭만적이다.

나처럼 음악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찾는다. 강한 동지애로 처음 만난 뮤지션과도 “아, 음악 잘 듣고 있습니다” 하며 친구가 되고, 악기를 들고 즉흥적으로 라이브 연주라도 시작하면 바로 진풍경이 연출된다. 얼마 전에는 내한공연을 온 ‘레이철 야마가타’도 와서 노래를 부르다 갔다고 한다.

새벽 3시가 넘으면 토끼굴은 마감을 준비한다. 사장인 수진 누나, 수진 누나의 짝꿍인 민재 형이 정리를 마치면 마지막까지 남은 우리들은 누나와 형을 따라 마지막 한 잔을 더 기울이러 간다.

주로 찾는 곳은 인근의 고갈비집. 괄괄하지만 정겨운 욕을 하는 호방한 이모가 지글지글 익은 고갈비를 내오면 우리는 다음날의 숙취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소주를 마신다. 사실 중요한 건 소주나 고갈비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한다는 것.

절대로 온전히 외롭지 않게 되지 못할 것임을 알지만 그래도 정말 그 외로움을 참아내기 어려운 날 그들과 함께한다. 뜨거운 술로 왁자지껄한 이야기로 그날만이라도 혼자가 아닐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한다.

언제까지 청춘일 수는 없다. 언젠가 지금처럼 밤을 새우고 술을 마실 수 없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지만 나는 언젠가 지금의 시기를 ‘한창 토끼굴 들락거리던 시절’로 회상하게 될 것 같다.

강백수 인디뮤지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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