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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주 제조법 캐묻고 다니다 간첩으로 신고당하기도 했죠”

등록 2014-11-19 20:59수정 2014-11-20 10:26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 전통주 명인들
이강주·추성주·송화백일주 복원하는 데 평생 바친 3인방…해외로도 눈돌려
전주 ‘이강주’ 조정형 명인
전주 ‘이강주’ 조정형 명인
전주 ‘이강주’ 조정형 명인

“집안에서 ‘미친놈’ 소리를 들었다. 술에 미쳐 직장도 그만두고 전국을 다니니 양반가 집안에서 나올 만도 한 소리지.” 대표적인 전통주 전주 이강주의 명인 조정형(73)씨 얘기다.

그의 술 기행은 드라마다. 전북대 농화학과를 졸업한 그는 삼학소주, 보해, 한일소주 등의 주류업체에 1964년께 입사해 25년간 일했다. 공장장도 했다. “월급, 많았지. 돈 모아 전국 민속주 조사 나서고 돈 떨어지면 다시 공장장 시작해 벌고 모이면 또 떠나고 했지.” 번 돈을 쏟아 열한번이나 이사를 다니며 전통주 연구에 몰두했다. 모친의 태몽 때문일까? 무쇠솥이 땅에서 솟구치는 태몽 얘기를 들은 부친은 평생 굶지는 않겠다면서 ‘솥 정(鼎)’ 자를 이름에 넣었다. 술은 고두밥을 짓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다른 사업도 잠깐 했지만 결국 다시 술로 돌아가더라.” 난감한 일들도 많았다. “시말서 많이 썼다. 서울로 출장 간 사람이 여수에서 목격된 거야. 기웃기웃하면서 꼬치꼬치 캐묻고 조사하니깐 (나를) 신고했어. 간첩으로 본 거지.” 잡지사 기자라고 속여 물어도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70년대는 엄혹한 시절이었다.

“경쟁이 심하니 새로운 술 개발을 고민했고, 공장장으로서 우리 술 당연히 연구해야 된다고 생각했어. 인생에서 뭔가도 남기고 싶었지.” 1980년대 중반은 전통주 혹은 가양주(가정마다 내려오는 제조법으로 만든 술)란 말조차 낯선 때였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가양주 말살정책으로 우리 술은 거의 사라졌고, 쌀이 부족했던 60년대는 소주가 대세였다. 정치인, 검사, 군인 등 사회지도층의 난투극으로 번진 양주폭탄주 사건 등이 터져 비난을 받아도 대중은 양주를 귀한 술로 여겼다. 그는 할머니가 빚었던 집안의 술, 이강주 생각이 간절했다. 전국 전통주 유람은 이강주를 제대로 살려보겠다는 그의 노력이었다. 한학자였던 부친의 반대가 컸지만 1991년 전셋값과 빚낸 돈을 합쳐 철판 몇 개를 사고 장작으로 불 지펴 500여병의 이강주를 처음 생산했다. “술병은 시장 가서 그냥 빈병 사와 썼다.”

회상에 잠긴 그가 주섬주섬 보따리를 풀어 누렇고 낡은 종이뭉치들을 보여준다. 술 유람하면서 정리한 자료들과 사진이다. ‘젊은 조정형’이 산자락에 앉아 소줏고리에 불을 지피고 있다. 사진에 ‘토고리에서 닦다’란 글이 적혀 있다. 타자기 문서는 신기할 따름이다. 그 조사를 바탕으로 <다시 찾아야 할 우리의 술>(1989년) 등 여러 권을 출간했고 일부는 외국으로 번역돼 나갔다. 1997년 이강주 상표등록을 하고 공장도 증설했다. 각종 상을 휩쓸고 모스크바, 도쿄식품박람회 등에도 참여했다. 그는 술쟁이들 사이에서 존경받는 어르신이다. “여전히 우리 술은 어렵다. 매출이 반토막이다. 요즘 수입 맥주 많이 마시지 않나!” 그의 열정은 보글보글 계속 끓는 발효방울 같다. 2012년 네덜란드에 이강주 영업소를 열어 처음 수출을 하고 유럽한인신문인 <유로저널>에 지금까지 이강주 광고를 한다.


담양 ‘추성주’ 양대수 명인
담양 ‘추성주’ 양대수 명인

담양 ‘추성주’ 양대수 명인

추성주, 타미앙스, 대통대잎술. 이름도 맛도 도수도 다른 이 술들은 한 사람이 만든다. 전남 담양군의 ‘추성고을’의 주인 양대수(57)씨다. “양조를 돕는 아들이 안쓰럽지. 음주문화 예전 같지 않고, 이름나고 술 팔려도 실속은 없어요.” 그는 어두운 얘기로 말문을 열었지만 밝은 미소가 떠나지 않는 유쾌한 추성주 장인이다. 담양의 술 명인 하면 그를 떠올리는 전통주 애호가들이 많다. 그는 본래 농협을 다녔다. 동갑인 아내 전경희씨는 우체국 직원이었다. “어휴, 지금까지 다녔으면 사는 게 좀 편했을라나!” 전씨의 말이다. 눈빛을 맞추면서 주거니 받거니 술 얘기를 하는 부부는 금실이 좋다. 부부의 정으로 술을 빚었다.

추성주가 세상에 얼굴을 내밀게 된 것은 오로지 양씨의 노력 덕분이다. 증조부는 연동사 주지가 알려준 추성주 제조법을 갖고 있었다. 김용의 무협지에 등장하는 무림고수가 마치 무림비책을 꼭꼭 숨겨둔 꼴이다.

증조부는 소량 만들어 이웃들에게 나눠줬다.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얘기 한창 나올 때, 우리 쌀 소비에 관심을 갖게 됐다. 농협을 다녔으니 당연했고, 30대, 만학으로 늦게 대학을 가 공부를 하다 보니 더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쌀 소비책으로 증조부의 술 생각이 났다.”

퇴근해 방에 처박혀 동틀 때까지 제조법을 따라 술을 빚었다. 아이들이 노는 방에는 온통 시큼한 누룩 냄새가 차올랐다. 그때쯤이었다. 농협조합장 선거 바람이 불었다. 인생은 어쩌면 철길처럼 정해진 게 아닐까! 그는 아쉽게 조합장 선거에 떨어졌다. 술 명인의 길에 전념하게 된 계기가 됐다. “90년대 중반인가? 일본인이 한번 맛보고 살 수 있느냐 물었을 때 신났다. 200병 든 박스 20개를 싣고 직접 부산항에 갔다.” 술을 빚다 보니 농업정책의 문제점에 시선이 갔다. 그는 2000년대 중후반, 당시 민주당 배지를 달고 담양군의회 의원에 당선돼 이후 의장까지 맡았다.

양조장 운영은 아내의 몫이 됐다. “지금도 (아내가) 고맙다.” 의원 활동은 쌀 소비를 증진하고 우리 술을 살리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찾은 길 중의 하나였다. 아들 재창(31)은 영업을, 딸 소영(35)은 홍보를 맡았다. 가족 포함 양조장 식구는 모두 6명. 그는 전통주 시장의 확장을 위해 요즘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 세계 술 품평회에 타미앙스를 출품해 금상을 탔다. “전통주가 발전하려면 비싼 증류기 같은 시설이나 쌀 지원이 필요하다.”


완주 ‘송화백일주’ 조영귀 명인
완주 ‘송화백일주’ 조영귀 명인

완주 ‘송화백일주’ 조영귀 명인

전북 완주군의 송화양조에서는 송화백일주와 송죽오곡주를 빚는다. 이 술들은 사찰법주로 제조법이 수왕사 주지들로 이어져 내려온다.

조영귀(65) 명인은 해발 700m가 넘는 모악산 자락의 수왕사의 주지로 송화양조를 차려 최소 조선조부터 내려온 법주의 맥을 잇고 있다. 이 술들은 수도승의 고산병 예방과 조선조 진묵 대사(1562~1633) 다례주로 쓰였다.

조 명인은 12대 전승기능보유자다. “이제는 송죽오곡주보다 송화백일주가 더 유명하다. 송화백일주의 ‘100’은 술이 완성되는 기간이기도 하지만 ‘100일기도’란 말이 있듯이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숫자다.” 팔각누룩으로 빚은 송화백일주는 향기가 산을 뒤덮을 정도로 좋아 산짐승도 찾아들었다고 한다. “술 단지를 열면 벌들이 몰려와 많이 쏘이기도 했지.” 팔각누룩 틀은 이전의 주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모양 자체가 팔각이다.

한 줌의 송홧가루를 틀에 넣어 누룩을 만들었다. 조 명인은 12살에 입적해 흥복사 큰스님의 시봉 생활을 3년 가까이 했다고 말한다. “김제가 고향인데 집안은 과수원 하고 부유한 편이었어요. 그때는 어려워서 입적하는 이가 많았는데 내 경우는 11살에 지켜본 삼촌의 죽음이 영향이 컸지요.” 수왕사와의 인연은 17살부터였다. 송화백일주를 만드는 과정은 어린 청년에게는 수행의 길이었다. 암자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누룩방에는 구불구불 뱀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독사가 발견될 정도라 문을 아예 닫았다.”

86년 아시안게임, 88년 올림픽을 앞둔 즈음에 송화백일주가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했다. 그 기운을 받아 1994년에는 대한민국 식품명인 1호로 그가 지정됐다.

그는 풍수, 조각, 무술에도 조예가 깊다. 노무현 전 대통령 퇴임 1년 전, 청와대에 납품한 송화백일주 디자인도 그가 진두지휘했다. “전라북도 대학생들 모집해, ‘무궁화’ 넣어 제작했어요. 위보다 아래가 넓은 뚜껑은 내 작품이지.” 소줏고리나 재래식 술독 대신 스테인리스 발효통을 사용한다. 도구는 바뀌어도 제조법은 그 옛날과 같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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