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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그리실라우맨’ 얀 할아버지

등록 2014-11-26 20:22수정 2014-11-27 11:22

사진 김소민 제공
사진 김소민 제공
[매거진 esc] 김소민의 타향살이
“그림 한번 그리실라우? 술 한잔 값이야.” 본의 한 술집, 어깨 늘어진 체크무늬 재킷 차림 백발노인이 물었다. 한 사람이면 6유로인데 셋이면 15유로로 깎아준단다. 1~2유로에 바들거리는 나야 어색한 미소로 때우고 넘어가려는데 앞에 앉은 클라우디아가 냉큼 그러겠단다. 옆에 앉은 남자와 한창 연애 중이라 세상이 운명적 의미로 가득 차 보이는 위기의 여자다. 낡은 가죽가방에서 종이와 연필을 꺼낸 할아버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라 몇 번 지시하더니 5분 만에 끝이란다. 결과물 보며 다행이다 했다. ‘클라우디아가 내기로 했지.’ 아니었다면 밤새 속이 복작거렸을 뻔했다. 연필 끝을 세워 동그란 점으로 눈 찍고 팔은 니은자로 꺾어 그렸다. 극단적 동양인인 나와 큰 코에 푸른 눈동자 클라우디아가 그림 속에선 머리 길이 말고는 똑같이 생겼다. 클라우디아와 남자가 연인이라니 둘 사이엔 하트를 그려 넣었다. 파격이 있겠거니 하는 고정관념을 깨는 파격이라면 파격이겠다. 문외한인 내겐 8살짜리 조카의 낙서 같았다. 사랑의 호르몬에 일시적 환각 상태인 클라우디아가 연애 인증서라도 되는 양 그림을 조심스레 받았다. “저 사람이 ‘한번 그리실라우맨이야. 여기서 모르는 사람 없지.”

‘한번 그리실라우맨’이라 불리는 이 노인의 본명은 얀 로(84), 그가 밤마다 본 시내에 출몰하기 시작한 것은 1997년께다. 저녁 8시가 되면 검은색 자전거를 타고 나타나 새벽 1~2시까지 술집과 카페 돌며 아무나에게 물었다. “즐겁잖아. 돈도 벌고. 그림 그리면 세상을 훨씬 더 강렬하게 이해하게 돼. 사람 얼굴이 세상에서 제일 흥미로운 평면이지. 웃을 때 입꼬리가 어떻게 올라가나, 눈을 어떻게 찡긋하나…. 매 순간 한 얼굴에서 에너지도 바뀌거든. 한 사람 한 사람 다 달라. 그림 그리면서 사람을 배우는 거지.” 어릴 때부터 그림 좋아했지만 따로 배운 적은 없다. 13살 때 2차 세계대전이 끝났는데 대체 왜 세상이 이 모양인지 궁금해 정치와 심리학 공부를 했다. 30년간 공무원으로 해외 협력 업무를 맡다 퇴직한 뒤 실험 삼아 “한번 그리실라우”를 시작했는데 재미 붙였다.

혼자 사는 얀의 집엔 텔레비전, 라디오, 인터넷이 없다. 새벽 2시께 집에 들어간다. 늦잠 자고 일어나 천천히 아침 겸 점심 차린다. 2~3시간 동안 신문 읽고 빨래를 한 뒤 저녁이 되면 함께 늙어가는 자전거에 올라탄다. 주말도 빠짐이 없다. “거절당할 때가 대부분이지. 예전엔 술집이 장사가 잘돼 3시까지 그리기도 했는데…. 그래도 괜찮아. 유행에 길들여져 자기가 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자기 그려준다면 안 좋아하는 거지. 존재는 예쁜데 취향이 구질구질하지.”

단골도 있다. 페터는 10번째 얀에게 그림을 맡기고 그에게 헌정하는 홈페이지도 만들었다. 그 안엔 얀의 고객들이 올린 그의 그림 100여개가 전시돼 있다. 페터, 나, 클라우디아, 그의 남자친구까지 안경 쓰고 벗고 말고 남녀불문 인물 호혜평등이다. 똑같아 보인다니 얀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자신은 “영혼의 심장을 단숨에 포착해 그렸다”고 했다.

사실, 애초에 중요한 것은 그림이기보다 얀의 존재 자체인지 모른다. 클라우디아가 그림을 돌돌 말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 “‘한번 그리실라우맨’이 안 보이면 이 도시에서 뭔가 빠진 거 같을 거야.”

김소민 독일 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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