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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를 읽는 시간 ‘마들렌 타이밍’

등록 2016-06-23 10:30수정 2016-06-23 10:56

조은미의 빵빵빵
빵집 ‘메리 케이트’ 주인장
“운명이란, 인연이란 타이밍이 중요한 건가봐. 내가 있어야 할 순간에 내가 있었더라면 그때!” 사랑은 타이밍이다. 마들렌을 먹으며 ‘버스커 버스커’의 노래를 듣는다. <응답하라 1988>에서 정팔(류준열)도 택이(박보검)와 한발 차이로 덕선이(혜리)를 놓친 순간 씁쓸히 읊조렸다. “사랑은 타이밍이다.”

딱 그 순간이란 게 있다. 있어야 할 ‘순간’이나 절대 있어선 안 되는 ‘순간’이다. 절묘하다. 내가 마침 맘에 안 드는 후줄근한 옷을 입고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는데 “밥 먹는 게 꼴 보기 싫어서”라며 결혼식 전날 나를 차버린 남자가 나타나 “오랜만이야”라고 인사하는 순간 같은 것 말이다. 망할 타이밍 앞에 나는 가끔 뜨거운 물에 들어간 오징어가 된다. ‘그럴 땐 마들렌이나 먹어야지’라고 생각한다.

사랑만 타이밍이냐? 인생도 타이밍이다. 요리는 더 타이밍이다. 보글보글 끓는 물에서 딱 제 타이밍에 건져 올려야 파스타 면은 꼬들꼬들하다. ‘레몬머랭타르트’에 얹는 이탈리안 머랭, 거품 낸 달걀흰자에 뜨거운 설탕 시럽을 들이부어 만드는 이탈리안 머랭은 설탕 시럽이 끓는 정확한 온도를 놓쳐버리면 머랭이 아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새하얀 머저리 덩어리가 된다.

한편으로 인생이 꼬이는 것도 타이밍 때문이다. 타이밍을 놓치면 죽도 밥도 아니다. 오븐에서 꺼낼 타이밍을 놓치면, 빵도 돌덩이가 된다.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고 헤매다 결정 장애에 시달리면, 타이밍은 없다. 저만치 날아갔다.

아무래도 인생엔 결정적 타이밍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젊은 날에 야구장에서 그가 좋아하는 야구를 보다가 불현듯 깨달았다고 했다. ‘소설을 써야겠다’고 말이다. 한 야구선수가 날린 2루타를 보고 그랬다던가? 날아온 야구공에 머리를 맞은 것도 아닌데 희한하다. 아무튼 재즈바 사장 하루키는 그길로 돌아가 소설을 썼고 소설가가 됐다. 처음 쓴 소설로 문예지 신인상까지 받았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마들렌을 먹다가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했고, 그렇게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성했다고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마들렌을 먹다가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했고, 그렇게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성했다고 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르셀 프루스트는 마들렌을 먹다가 불현듯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코끝을 간질이는 마들렌의 향기가 갑자기 프루스트를 회춘시켰다. “갑자기 모든 기억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맛은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고모가 차에 살짝 담가 내게 건네주던 바로 그 마들렌의 맛이었다.”

조개껍질 모양 철판에 붕어빵처럼 찍어낸 스펀지케이크 같은 마들렌은 프루스트에겐 아름다운 추억의 다른 이름이었다. 마들렌은 프루스트에게 잃어버린 기억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자신감도 되찾아줬다. 프루스트는 코르크로 방음한 골방에 틀어박혀 몇 년간 미친 듯이 글을 썼다. 그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 홍차에 살짝 담갔다 꺼낸 마들렌의 기억 복원력은 어찌나 대단했는지 이 책은 7권이나 된다. 거기서 ‘프루스트 현상’이란 말까지 생겼다. 향기가 기억을 이끌어내는 걸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부른다. 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면, 잃어버린 잠이 솔솔 돌아온다. 그걸 나도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부른다. 어쩌다 읽어봤는데, 달콤한 마들렌 먹을 생각만 돌아왔다. 마들렌 타이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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