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크 하얏트 서울의 ‘베리빙수’. 박미향 기자
빙수가 춘추전국시대를 맞았다. 팥, 연유가 올라가는 전통적 형태의 빙수부터 샴페인, 옥수수, 고구마 같은 독특한 재료의 빙수까지, 맛과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한 그릇에 3만~8만원대인 고가 빙수도 등장했다.
우리나라에서 빙수는, 잘게 부순 얼음에 단팥을 얹어 먹었던 일본 음식이 일제강점기에 건너오면서 생겼다고 한다. 당시의 빙수 장수는 손수레에 얼음덩어리를 싣고 다니다, 손님이 오면 그 자리에서 갈아 팥, 색소 등을 얹어 팔았다.
1970년대 들어선 빙수가 여름 한철 제과점의 대표 메뉴로 자리잡았다. 지금은 사라진 강남 ‘뉴욕제과’의 가래떡빙수가 특히 유명했다. 가래떡처럼 굵고 긴 얼음에 연유와 팥을 올린 빙수였다. 대전의 ‘성심당’은 당시 포장 빙수를 팔았다. 1980년대 ‘밀탑’의 탄생은 빙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일이 됐다. 달콤한 연유를 넣은 밀탑의 팥빙수는 20년 넘게 빙수계의 지존이었다.
1990년대 들어선 토핑 재료로 통조림 과일을 사용하고, 재질을 첨단화한 빙수기계가 개발되면서 빙수 ‘발전’의 새 전기가 마련됐다. 당시 일간지에는 가정에서 빙수를 만드는 법이 기사로 자주 등장했다. 제과제빵전문지 <파티시에>의 발행인 장상원씨는 “2000년대 들어 카페 문화가 활성화되면서 제과점에서만 팔던 빙수가 메뉴 다양화를 추구하는 카페에도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빙수는 팥, 각종 토핑의 맛도 중요하지만 얼음의 질이 맛을 좌우하기도 한다. 그래서 빙수의 역사는 얼음의 역사이기도 하다. 우리는 신라시대부터 반빙(얼음을 나누는 일), 장빙(겨울철 얼음을 저장하는 일) 제도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냉빙고, 동빙고, 서빙고 같은 저장고가 있었고, 종묘사직의 제사에 얼음을 바치기도 했다.
냉장고가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전인 1970년대까지는 얼음 장수의 역할이 컸다. 얼음 장수는 1950~1960년대 초까지 천연빙을 팔아 한여름 더위에 지친 이들을 위로했다. 얼음은 겨울철 한강에서 구했다. 한강에 얼음이 30㎝ 두께로 얼면 가로 60㎝, 세로 40㎝ 크기의 금을 긋고 톱으로 잘랐다. 얼음 저장고는 산중턱이었다. 무거운 얼음을 옮기는 일은 고역이었다. 당시 형무소의 수감자들이 일꾼으로 동원됐다. 녹을 것을 염려해 밤에만 작업을 했다. 형무소는 수감자들을 이용해 부수입을 올리고, 수감자들은 밤참으로 나오는 하얀 쌀밥을 먹을 수 있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다. 1960년대 초 대장균이 검출되는 등 위생관리가 철저하지 못했던 천연빙 채취가 완전히 금지되자 고압 암모니아 가스로 얼린 인조빙이 등장했다. 이 인조빙이 인공색소와 팥을 뿌린 빙수의 재료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중반 들어 얼음은 깎는 방법에 따라 변신한다. 흡사 눈꽃 같은 얼음이 등장하나 싶더니 대패로 깎은 듯한 얼음도 나타났다. 2010년 이후 빙수는 당시 꽃피기 시작한 디저트 문화와 결합해 무한대로 진화했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참고자료 <경향신문>(1977년 8월6일치), <우리 생활 100년 음식편>, <한국의 식생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