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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등록 2016-10-12 19:25수정 2016-10-12 19:49

[매거진 esc] 김보통의 노잼, 노스트레스
김보통
김보통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내 세계의 끝은 신대방역이었다. 물론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들 다 만나고 올 것’이라는 사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익숙한 것으로부터 떠나는 가장 첫 관문'이라는 의미에서 마을버스로 서너 정거장 떨어져 있는 작은 지하철역은 ‘아는 세계'의 끝이자, ‘낯선 세계'로 이어지는 관문이었다.

구로디지털단지역과 신림역 사이에 위치한 신대방역은, 지하 구간인 신림역에서 지상 구간으로 이어지는 곳이다. 출퇴근 시간 유동인구가 많아 매우 혼잡한 두 역 사이에 끼어 있으나, 정작 이 역에서는 타는 사람도 내리는 사람도 많지 않아 사람들이 꽉꽉 들어찬 지하철을 몇 대씩 그냥 보내는 일이 흔한 한적한 역이었다.

역의 한쪽 끝(신림역 방향)으로는 보라매공원을 지나 지하철이 지하 구간으로 들어가거나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반대쪽 끝으로는 지상 구간을 통해 다음 역까지 지하철이 ‘슬슬슬’ 가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마침 그쪽이 서쪽이라 해가 질 땐 노을을 등지고 구로디지털단지역에서 출발한 지하철이 다가오는 모습이 마치(식상한 표현이지만) 한 폭의 그림 같던 터라, 플랫폼 끄트머리에 선 채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당시 나는, 주로 사생대회를 가기 위해 신대방역을 찾았다. 그래서 기억 속 플랫폼에 서 있던 나는 늘 검은색 4절 화판을 들고 있었다. 친구와 함께 서 있는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혼자였다. 그래도 어색하거나 불안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런 ‘그림 같던 풍경’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중학교 2학년의 나는, 제법 고민이 많았다. 코밑에 거뭇거뭇하게 수염 비스무리한 솜털과 함께 사타구니 사이로 음모가 한두 가닥 자라나기 시작했고, 얼굴이 예쁘고 공부도 잘하던 부반장이 혹시나 나를 좋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망상에 된통 빠져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미술 교과를 담당하던 담임 선생님이 예술고에 진학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한 것이 고민의 원인이었다.

그랬다. 나는 그림을 제법 잘 그리는 학생이었다. 학교 대표로 여기저기 사생대회에 참가하곤 했다. 그래서 그렇게 뻔질나게 신도림역에 화판을 든 채 서 있던 기억이 많다. 상도 줄곧 받았는데, “없는 집 자식이 예술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라, 받아온 상장은 저기 어디 안 보이는 서랍 안에 쌓여만 있었다.

당연히 예술고 진학도 안 될 말이었다. 정확히 ‘안 된다'는 말을 듣지도 못했다. 아버지에게 “담임 선생님이 본격적으로 예고 입시 준비를 해보는 게 어떠냐는데요”라고 말했을 때, 그는 별 황당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하하하' 웃더니 땅바닥에 침을 뱉고 가게로 일을 하러 갔다. 그게 아마도 ‘안 된다'는 것이겠거니 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어찌됐든, 나는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신대방역을 종종 찾아 노을이 지는, 눈이 내리는,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낙엽이 날리고, 별이 빛나고 달이 뜨는, 해가 뜨고, 다시 또 노을이 지는 풍경 사이로 지하철이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향하고, 돌아오는 모습을 내내 혼자 지켜보곤 했다. 이듬해부턴 그림을 그리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금 그 풍경을 본 기억은 없다.

김보통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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