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ESC

내 인생의 과일, 귤

등록 2016-10-19 19:24수정 2016-11-02 20:14

[ESC] 홍창욱의 제주살이
홍창욱 제공
홍창욱 제공
시골에서 자란 나는 유난히 음식에 대한 기억이 많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여섯 살 때 서울 친척집에 가서 먹었던 ‘해태 부라보콘’이다. 인생 첫 아이스크림이었다. 맛있기도 했지만 처음 본 도시의 아파트와, 사진 찍기 싫어서 울었던 추억이 머릿속에 영화 필름처럼 남아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먹어본 순대, 그 맛 또한 잊을 수 없다. 평생 농사만 짓다 부산의 신발공장에 다니게 된 엄마가 퇴근길에 사다 준 순대였다. 모양이 이상하긴 했지만 식은 순대를 양념장에 찍어 먹는 맛이 기가 막혔다. 곧 엄마가 공장을 그만두게 되자 순대를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한참을 아쉬워했다. 비슷한 시기에 출시된 과자가 ‘포카칩’이다. 마산에서 자취하는 누나가 시골집에 올 때, 나는 항상 벽에 적어둔 이 세 글자 이름을 전화로 불러주며 사오라고 했다.

중학교 다닐 땐 누나들과 자취를 했다. 큰누나가 김치찌개에 프랑크 소시지를 넣은 것을 보고는 격분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바로 ‘부대찌개’였다. 어릴 적 대장염을 앓다 몸이 회복될 때 제일 먹고 싶은 것은 뜻밖에도 읍내 중국집 ‘짬뽕’이었다.

과일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나나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아버지의 지인인, 서울 가락시장의 청과상회 아저씨가 집에 바나나를 가져왔다. 나는 ‘맛있으면 바나나’란 가사 속의 그 바나나를 원 없이 먹어보았다.

귤은 내 기억 속으로 가장 최근에 들어온 과일이다. 서울을 떠나기 전 살던 곳은 강서구 까치산역 근처였다. 광화문까지 30분이면 지하철로 출근할 수 있는데다, 다른 지역보다 비교적 집값이 쌌다. 전철역에서 나오면 작은 재래시장과 연결이 되는데 서민들이 사는 곳이어서 그런지 물가가 싼 편이었다. 삼천 원에 한 봉지 가득 사와 아내와 까먹던 귤은, 어렵고 힘든 일투성이였던 사회 초년생 시기의 우리 가족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결혼한 다음해인 2009년에 귤의 고장 제주로 내려왔다. 제주에 와서 가장 놀랐던 것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올 때 귤을 공짜로 주는 것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공짜 귤을 본 체 만 체 하는 동료들이었다. 나는 공짜 귤을 한 움큼 쥐고 나오며 주인 눈치를 봐야 했다. 그 뒤로 직장 동료가 회사로 포대자루 한가득 귤을 싣고 왔다. 이웃집에서도 귤을 가져왔다. 그렇게 받아온 귤은 미처 다 먹지 못해 썩어 버렸다. 그해 겨울을 나며 깨달았다. 제주에서 귤은 사먹는 과일이 아니며 만약 사먹는다면 제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또 한번 놀란 것은 귤의 맛이다. 제주에서 반드시 먹어야 할 음식에는 돼지고기뿐 아니라 감귤이 꼭 포함되어야 한다고 본다. 서울에서 먹는 귤은 제주의 대형 선과장에서 씻기고 말려지며 광택까지 인위적으로 입혀서 유통되기에 언제 수확됐는지 알 수 없다. 공판장-도매-소매 등 여러 단계를 거치며 과일 자체의 신선한 맛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제주에서 먹는 귤은 밭에서 바로 따서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 며칠 걸리지 않는다. 톡 쏘는 ‘산미’가 살아 있고 당도 또한 높다. 최근엔 1월에만 맛볼 수 있는 레드향, 과즙이 풍부하고 향이 좋은 천혜향 등 1년 내내 다양한 귤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별도의 시설을 빌리지 않고 햇볕과 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자란 ‘노지귤’이야말로 자연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싶다.

10월 중순부터 햇귤이 출하된다. 제주의 할머니들은 일당 6만원을 받으며 하루 600㎏의 귤을 거뜬히 딴다. 농부에게 직접 주문하는 직거래는 신선한 귤의 산미를 느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 맛을 본다면 ‘인생 과일’, 혹은 ‘인생 음식’ 리스트에 귤을 넣어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농민들에게 노동의 대가를 되돌려주는 정의로운 방법이기에 더더욱 마다할 이유가 없다.

홍창욱 <제주, 살아보니 어때?> 지은이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ESC 많이 보는 기사

70년간 갈비 구우며 신화가 된 요리사, 명복을 빕니다 1.

70년간 갈비 구우며 신화가 된 요리사, 명복을 빕니다

만찢남 “식당 창업? 지금은 하지 마세요, 그래도 하고 싶다면…” 2.

만찢남 “식당 창업? 지금은 하지 마세요, 그래도 하고 싶다면…”

내가 만들고 색칠한 피규어로 ‘손맛’ 나는 게임을 3.

내가 만들고 색칠한 피규어로 ‘손맛’ 나는 게임을

히말라야 트레킹, 일주일 휴가로 가능…코스 딱 알려드림 [ESC] 4.

히말라야 트레킹, 일주일 휴가로 가능…코스 딱 알려드림 [ESC]

새벽 안개 헤치며 달리다간 ‘몸 상할라’ 5.

새벽 안개 헤치며 달리다간 ‘몸 상할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