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착하게 살았는데, 대체 왜 벌서는 기분이지?”
이번 설에도 사방이 꽉 막힌 도로 위에서 나는 작년과 똑같은 탄식을 반복할 것이다. 전국의 효자들이 평소에는 잘도 까먹고 살더니 ‘그놈의 뿌리’를 찾아 집단농성이라도 하듯 귀성길에 오를 테니까. 나도 개중 하나고, 거센 파도 위의 속이 텅 빈 조개껍데기처럼 밀리고 쓸려 조상님을 모시러 큰집이 있는 부산에 가야 한다. 객지에서 얻은 처자식을 전리품처럼 대동하고 말이다.
매년 명절마다 어머니와 동생과 나는 아버지의 전리품 신세였다. 엄숙하고 지루한 차례 의식이 끝나면 아버지 손에 이끌려 아버지의 고향 어르신들께 인사를 드려야 했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들은 꼭 귀순용사 같았고, 나는 이러다가 설날 특선 영화를 놓치는 건 아닐까 온통 그 걱정뿐이었다. 어머니와 동생의 어두운 표정을 그때는 미처 살피지 못했다.
차례 음식을 준비할 때는 어머니뿐만 아니라 큰어머니와 작은어머니부터 시집 ‘못’ 간 고모들까지 집안의 여자들이 총동원됐다. 남자들은 조금도 거들지 않았다. 종종 밤에 내 등을 긁어주던 작은고모는 시집을 가더니 감감무소식이었다. 작은고모가 하던 명절 노동은 큰집의 누나들이 대신했다. 누나들마저 결혼한 뒤엔 시집온 형수님들이 그 역할을 맡았다. 반면 차례를 지낼 때는 여자들이 철저히 배제됐다. 또 여자들과 갓난아이들은 차례를 마친 남자들과 겸상을 하지도 못했다.
말하자면 여자들은 아버지의 조상을 모시다 결혼과 동시에 한 번도 뵌 적 없는 남편의 조상을 모시는 셈이다. 아니, 조상을 모시는 일은 어디까지나 남자들의 몫이고, 여자들은 그 남자들의 뒤치다꺼리를 도맡는다. 예나 지금이나 여자들에게 결혼은 해방이 아니라 또다른 구속이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동생에게 결혼을 강요한 적이 없다. 동생 역시 꽤 오래 만난 애인이 있지만 결혼 생각은 아직 없다고 했다.
그나마 우리 집안의 명절 풍습은 그동안 꽤 많이 바뀌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절차를 최대한 간소화했고, 차례 음식을 준비하고 치우는 모든 과정을 남자들이 거들기 시작했다. 이따금 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들도 옛날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고 말씀하신다.
그럼 과연 여자들 생각은 어떨까. 가령 누군가의 전리품이 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던 아내 쏭은 <대구의 밤>이라는 만화를 통해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냈다.
“지들(남자들) 조상 모시는데 왜 며느리들이 대신해야 되는데?”
쏭의 만화는 모두 허구의 이야기고, 문제의 대사는 만화 속 주인공이 친구에게 털어놓은 넋두리 중 일부다. 쏭은 나와 결혼하기 전까지 차례든 제사든 챙겨본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쏭은 여자들에게 노동착취와 다름없는 명절 문화를 기어이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아직 쏭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쏭이 자신의 불만을 설날 아침 차례상에서 쏟아내지 않고 창작의 불쏘시개로 써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그런데 혹시 조상님은 알까? ‘쏭도 장인어른과 장모님께는 귀한 자식이고, 또 나름 착하게 살았는데, 이 부조리한 악순환은 대체 왜 계속 반복되는 걸까요?’ 물론 조상님은 아무 대답이 없다. 결국 살아있는 사람들이 살아있는 동안 바꾸지 못한다면 이 악순환은 영원히 대물림될 것이다.
이참에 명절을 올림픽이나 월드컵처럼 4년에 한 번씩 치르는 건 어떨까. 설날엔 남편의 고향에 가고 추석엔 아내의 고향에 가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만, 그건 지나치게 균형을 맞추려는 억지일 수도 있다. 근본적으로 여자들의 노동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귀성 행렬 같은 대규모 야단법석은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 대신 명절마다 각자 알아서 보내고, 4촌 이상은 4년에 한 번씩 만나면 서로 그만큼 더 반갑지 않을까. 명절 개최지는 큰집과 작은집을 번갈아 가며 바꾸고. 물론 올림픽이나 월드컵도 어두운 이면이 있고 또 그 폐해가 만만치 않지만, 이혼과 불화를 조장하는 명절증후군보다는 낫지 않을까. 집집마다 뿌리를 섬기길 좋아하는 남자들은 하루속히 국제올림픽위원회(IOC)나 국제축구연맹(FIFA)의 규정을 준수하길 바란다.
실은 이 글의 첫 문단은 3년 전 설날에 했던 메모를 살짝 다듬었다. 어쩌면 추석에는 본문의 ‘설날’ 대신 ‘추석’으로 바꿔서 통째로 다시 게재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감쪽같겠지만, 그전에 부디 이 글을 다시 쓰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권용득/만화가·<하나같이 다들 제멋대로> 지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