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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장일치의 딜레마

등록 2017-03-15 20:10수정 2017-03-15 20:37

[ESC] Y기자, 내 인생은 시트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어린 시절 나에게는 맞수가 있었다. 이소라(가명). 엄마는 지금도 “소라가 네 맞수였잖아” 하신다. 소라는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차분했다. 반면 나는 키만 큰 왈가닥이었다. 같은 반이 된 적도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어른들 사이에서 둘이 종종 비교됐던 이유는 성적 때문이었다. 여자아이들 중 둘이 교내 1, 2등을 다퉜다.

선거 때는 치열하게 맞붙었다. 둘의 대결이 아닌 반 대결로 흐르는 경우가 많았다. 중학교 부회장 선거 때도 그랬다. 당시 나는 2반 반장, 소라는 1반 반장이었다. 각 반의 자존심이 걸린 한판승부였다. 양쪽 담임 선생님까지 나서서 적극적으로 선거전을 도왔을 정도다.

운동장 단상에서 후보연설을 할 때는 소라가 잘했다. 맺고 끊음이 분명했고 호소력이 있었다. 나는 온몸이 얼어붙은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 하지만 시골 중학교 선거에서 후보자 공약이나 연설 따위가 중요했겠는가. 평소의 이미지가 더 투표에 영향을 미치지.

드디어 선거날. 반마다 투표함이 설치됐고 학생들은 차례대로 투표를 했다. 내가 막 투표를 하려는데 담임 선생님이 나를 붙잡고 조용히 귓속말을 하셨다. “투표 신중하게 잘해야 해. 1표 차이로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었으나 나를 찍으라는 말씀이셨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싶어 한참 동안 망설였지만, 우리 반의 운명(?)이 걸린 선거에서 대표주자가 됐다는 생각에 나를 찍었다. 사실 그다지 부회장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반장을 하라면 했고, 부회장 선거에 나가라면 나갔다. 학생회 임원은 모범생이 하는 것이니까 으레 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나를 향한 투표가 더 찜찜했는지도 모르겠다.

투표가 끝나고 개표의 시간. 1반 투표함이 먼저 열렸다. 5표의 이탈표가 나왔다. 자신들의 반장인 소라가 아닌 2반 반장인 나를 찍은 것이었다. 그리고 2반 투표함. 헉. 100%, 만장일치였다. 평소에도 단합이 잘되는 반이기는 했으나 세상에 이만한 의리도 없던 듯하다. 개표하던 3학년 선배들까지 놀랄 정도였다.

담임 선생님이 “우와~. 우리 반 최고네”라고 감탄하고 있을 때 나의 머릿속은 하얘졌다. 만장일치가 되면서 내가 누구를 찍었는지도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단 한 표라도 이탈했으면 내 표의 향방은 아무도 몰랐을 터. 배신자(그때 분위기는 그랬다) 한 명 없는 친구들의 압도적인 지지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에서는 부끄러움도 밀려왔다. 아이들이 ‘쟤가 정말 부회장이 되고 싶었나 보다’라고 생각할 것도 같았다.

1학년, 3학년 표 집계에서도 나는 여유롭게 앞서며 부회장에 당선됐다. 중학교 여학생들(당시 여자 부회장 선거에서는 여학생만 투표권이 있었다)은 완벽해 보이는 소라보다 빈틈이 많아 보이는 나를 더 우호적으로 여긴 듯하다. 개표가 끝난 뒤 소라는 내게 말했다. “나도 너 찍었어.” 순간, 내 얼굴은 굳어졌다.

가끔 그때의 만장일치를 떠올린다. 무기명 투표에는 이름이 없다지만 ‘나’로 한정해 보면 기명 투표가 될 수도 있는 무기명 투표도 있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만약 우리 반 표에서 이탈표가 나왔으면 어땠을까. 내가 누구를 찍었는지는 비밀로 한 채 같은 반 친구들 중 누가 소라를 찍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소라도 그렇다. 나를 찍은 5표 중에 진짜 소라의 표가 있었을까. 그렇게 말한 건 혹여 패자의 마지막 자존심은 아니었을까. 다른 이의 순수함을 생각하기에는 내가 세월의 때를 너무 많이 탔나 보다.

Y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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