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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의 사랑

등록 2017-03-22 20:22수정 2017-03-22 20:37

[ESC] 김보통의 노잼, 노스트레스
김보통
김보통

고등학교 2학년 때 정치 과목 선생님은 기인이었다. 별명이 ‘베토벤’이었다. 심각한 곱슬머리를 일년 내내 자르지 않은 모습이 베토벤 같아 붙인 별명이었다. 외모 외에도 이런저런 기행을 많이 저질렀다. 대표적으로 누런 베이지색 점퍼를 일년 내내 입었다. 즐겨 입는 수준이 아니었다. 단 하루도, 단 한순간도 벗는 일이 없었다. 조회 중 아이들이 픽픽 쓰러지는 폭염 속에서도 목 끝까지 지퍼를 올린 채 입고 있었다. 학생들과 교내에서 쌍방 폭행을 하거나, 주말 학교 현관에서 태연하게 짜장면을 시켜 먹는 등의 기행도 목격됐다.

베토벤 선생님의 수업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내가 있던 반은 문과로 남학생과 여학생의 성비가 1 대 4였다. 내 짝은 여학생이었다. 키가 크고 쇼트커트를 한 채 껄껄거리며 호방하게 웃는 쾌활한 아이였다. 여자들은 물론 몇 안 되는 남자들 중에서도 남몰래 그 아이를 짝사랑하는 애가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는데, 그 가운데 나도 있었다.

짝사랑과 짝을 하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다. 수업시간 잠만 자던 나는 그때만큼은 안 자려고 노력했었다. 이미 나의 덜떨어진 모습을 알고 있어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사춘기란 ‘부질없음 위에 부질없음을 쌓아 망상의 성을 만들고 부수는 시기’다. 그것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정치 수업시간에 집중하고 있던 이유였다.

“국회의원 임기가 몇 년이야? 24번. 일어나서 대답해 봐!” 24번은 내 짝이었다. 짝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낌새가 수상해 슬쩍 고개를 돌려 얼굴을 올려다 보니 짝은 굉장히 난처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답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졸고 있다가 질문 자체를 못 들은 것이었다.

“대답 안 해?” 베토벤이 되물었다. 베토벤 선생님의 기행 중 하나는 불시에 던진 질문에 답을 못하는 아이의 미간을 분필로 찍어 멍들게 하는 것이었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멍 자국이 남아 석가모니처럼 되기 때문에 악명이 높았다. 다른 졸던 아이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챘고, 교실 안엔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졸지 않았었다. 수업에 집중을 하고 있어 질문이 ‘국회의원의 임기’라는 것과 그 답이 4년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나는 다급한 표정으로 내 눈을 바라보는 짝에게 진심이 담긴 눈빛을 보내며 천천히 입술을 움직여 답을 알려줬다.

‘40년.’

왜일까? 모르겠다. 잠시 미쳤던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짝은 나를 믿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40년입니다.”

교실 안은 잠시 멈춤 버튼을 누른 것처럼 정지했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다들 짝이 뭔가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했다.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뭐라고?” 하며 되물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안 짝은 다시 황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 믿을 것은 세상에 너밖에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녀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건 실제로 나뿐이었다. 이번에도 틀리면 영락없이 석가모니행이었다. 그래서 나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이번에야말로 확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400년.’

분명히 나는 미쳤던 것이다. 그러나 짝은 이번에도 나를 믿었다. 심지어 방금 전은 실수였다는 듯 살짝 웃으며 말했다. “아, 후후. 400년입니다.” 아름다운 미소였다.

반 아이들은 폭소했고 베토벤은 짝의 미간에 석가모니 멍을 만들었다. 짝은 내게 화내지 않았다. 왜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때 ‘혹시 정답을 알려줬더라면 사귈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는데,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란 걸 그때도 알고 있었다.

김보통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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