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할매’ 문영선(왼쪽)씨가 탐방객들에게 부산 국제시장의 한 이불가게 앞에 서 있는 상가 ‘준공 기념비’(1970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요즘 부산에서 가장 ‘핫’한 여행지는 ‘원도심(옛도심)’ 골목이다. 원도심 주변과 산자락, 한국전쟁을 거치며 피란민이 모여들며 형성된 서민촌이다. 화려한 항구도시의 고층 빌딩 뒤편에서 낡아가던 골목들이 몇년 전부터 부산을 대표하는 도보여행 코스로 떠올랐다. 부산 뒷골목 탐방을 한층 정겹고 풍요롭게 해주는 이들이 있다. 부산관광공사의 ‘부산 원도심 스토리 투어’를 이끄는 60~70대 해설사 ‘이바구(이야기) 할배·할매’들이다. 골목에 얽힌 이야기를 시락국처럼 구수하게, 밀면처럼 부드럽게 풀어놓는다는 할배·할매의 일과가 궁금했다. 지난 1일, 해설에 나선 ‘이바구 할매’의 하루를 따라가봤다.
국제시장 코스 김월림·문영선씨
봉사활동 하며 공부·자료준비
일정 취소되자 즉석 거리 해설
“부산 알리기 보람…젊어진 느낌”
오전 10시. 자갈치시장 입구 부산종합관광안내소.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단정하고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가 안내센터로 들어섰다. 국제시장 일대를 해설하는 김월림(78)씨다. 김씨는 국제시장길·초량동이바구길·흰여울마을길·공동어시장길·용두산공원길·영도깡깡이길 등 6개 원도심 코스에서 활동하는 61명의 해설사 중 최고령이다. “나이 많다꼬 몬할 게 머 있노. 잘한다 칭찬 마이 받아예. 홋홋.”
이날은 오후 1시에 서울에서 여행 온 은행 직원 19명을 상대로 한 해설이 잡혀 있다. 해설에 앞서, 자원봉사활동 가는 길에 자료 챙기러 들렀다고 했다. “겨울나고 오늘이 첫 해설이라 긴장 쫌 되네예. 잘해야 할 텐데.”
일본에서 태어나 6살 때 광복이 되면서 부산으로 와 줄곧 살고 있다는 김씨의 해설사 경력은 4년이다. 처음엔 쑥스러워 무척 힘들었지만 자료 찾고 공부하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김씨가 수첩을 꺼내 펼쳐 보여준다. 국제시장 일대의 볼거리·역사를 요약한 내용이 빼곡하다. “밤잠 줄여가 이래 정리해요. 딱 엑기스만 뽑아가.” 김씨는 해설사 일을 하며 더 젊어진 느낌이라고 했다. “카톡도 몰랐어예. 조금씩 배와가, 인자 폰카도 찍고 문자도 척척 보내고 잘해예.”
비가 계속 오자, 김씨는 오전 봉사활동을 포기했다. “비 와도 해설을 하느냐”고 물으니 “비님이 와도, 하자카믄 하는 기지예. 우산 쓰고 합니더” 한다.
11시30분. 김씨와 설렁탕으로 이른 점심을 먹으며 해설사의 애환을 들었다. 가끔 시간 약속 안 지키는 단체 여행자들이 있다고 했다. “한참 늦게 와 갖고, 빨리 하자, 설명 필요 없다 하는 분들이 있어예.” 더 서운한 건, 예약해놓고 연락도 없이 안 오는 경우다. 나이 드니, 해설 중에 연도·지명을 까먹을 때도 있다. “그라모 재빨리 수첩 뒤지가 디다봐예.” 그래도 힘든 때보다는 보람을 느낄 때가 많다고 했다. “집중하며 듣고 질문을 할 때, 특히 학생들이 궁금해하며 물어올 때 행복해져요.”
부산 원도심 스토리 투어를 진행하는 ‘이야기 할매’ 김월림(오른쪽)씨와 문영선씨.
12시30분. 안내소로 돌아와 그가 다른 해설사를 기다렸다. 오후 1시에 예약된 19명을 2개 조로 나누어 해설하기로 했다고 한다. 김씨는 긴장되는 듯, 수첩을 다시 꺼내 들여다보며 내용을 재확인했다. ‘이야기 할매’ 문영선(64)씨가 도착했다. 두 할매는 곧바로 준비에 들어갔다. 짙푸른 하늘색 해설사 옷을 꺼내 입고 이름표와 마이크를 차고 가방을 멨다. 가방엔 수첩과 생수 한통, 우산이 들어 있다.
12시50분. 두 할매가 탐방객들에게 선물로 줄 사진엽서 뭉치를 들고 안내소 앞으로 나가 기다렸다. 여전히 비가 오락가락이다. 1시20분인데 탐방객이 오지 않자, 김씨가 전화를 했다. 아직 식사 중이란다. “추부나 더우나 우린 고객 잘 모셔야 하는 기라.” “하모, 썽이 나도 참고, 늦게 와도 참고. 고운 말 골라 쓰고.”
1시50분. 다시 연락하니 받지 않는다. 2시 넘어 연락이 왔다. 일정을 바꿔 다른 곳으로 이동 중이란다. “꽝이네.” 두 할매 해설사는 허탈해했다. “미리 쫌 알려주지. 차암 못됐다.” “공짜니까 이래 한다 아이가.”
2시20분. 풀이 죽어 서성이던 두 할매를 기쁘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지나가던 모녀 여행자가 길을 물어온 것이다. 상세하게 설명을 해준다. 문씨가 갑자기 묘안이 떠오른 듯 모녀에게 말했다. “아예 저를 따라 오실래예? 제대로 해설해주꾸마.” 천안에서 여행왔다는 최은자(57)·강소령(33) 모녀는 횡재한 표정이었다. “와, 우리 둘만? 귀빈 투어네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해서 두 이야기 할매는 ‘꽝’을 면하고 제 몫을 하게 됐다.
2시30분. “일정이 취소되면 이렇게 즉석 투어도 해예.” 두 할매와 모녀가 탐방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렸던 비프(BIFF) 광장과 국제시장, 보수동 책방골목, 부평깡통시장을 둘러보는 코스다. 두 할매는 번갈아 나서며 열정적인 해설을 펼쳤다.
“자, 자갈치시장 일대는 일제 때 일인들만 이용하던 남빈해수욕장 자리라예. 다 매립됐죠.” “저기 약국 ‘약’자 간판 보이죠? 거기까지가 바다였어요. 거기 지금도 축대가 남아 있어예.”
비가 쏟아지자 두 할매는 우산을 펴들고 앞장섰다. 모녀도 우산을 펴고 따랐다. “저 동아데파트는 국내 최초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라예. 옛 동아극장 자리지라예. 일제 때 이 주변엔 상생관 등 20여개의 극장이 있었죠.” “상생관은 1916년 <원숭이와 게의 전쟁>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처음 상영된 곳입니다.”
국제시장길 코스에 대해 설명하는 ‘이야기 할매’ 김월림씨.
4시. 빗속에 진행된 골목 여행은 1시간 반 뒤 마무리됐다. 두 모녀는 감동한 표정이다. 최은자씨는 “부산에 자주 오면서도, 골목에 이렇게 흥미로운 얘기가 숨어 있는 줄 몰랐다”며 “다음에 올 땐 꼭 해설을 신청하겠다”고 했다. 할매들은 “비가 오는데도 따라오며 설명을 들어줘 우리가 더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예정에 없던 투어를 보람차게 마쳤지만, 두 해설사는 아직 일이 끝난 게 아니라고 했다. 일지를 쓰고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단다. 그날 일정과 진행상황, 탐방객 반응 등을 기록해 관광공사에 제출한다. 하루 해설에 나서면, 수고비는 얼마나 받을까. 교통비·점심값으로 4만원이 나온다고 했다. “운동하고, 일하고, 돈도 받으니 좋지요. 힘닿는 데까지 해야지. 늙었다고 그만두라면 할 수 없고. 호호호.” 보람과 자부심이 넘친다.
4시30분. 이야기 할매들은, 일지 쓰고 손주도 돌봐야 한다며 서둘러 지하철 남포역으로 향했다. 비 그치고 구름이 열리며 햇살이 두 할매의 파란색 해설사 옷을 비췄다. 등에 적힌 ‘이야기 할배·할매’ 글씨가 유난히 크고 또렷하게 다가왔다.
부산/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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