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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가난했으므로 당신을 만났습니다

등록 2009-12-22 22:25

여자복싱 김주희 선수-정문호 관장
여자복싱 김주희 선수-정문호 관장
[우리는 단짝] 여자복싱 김주희 선수-정문호 관장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거인체육관’ 사무실에 들어서니 챔피언벨트 3개가 한눈에 들어왔다. 김주희(23)가 지난 9월5일 여자국제복싱협회(WIBA), 여자국제복싱연맹(WIBF), 세계복싱연합(GBU) 라이트플라이급 3개 기구 통합 세계타이틀전에서 한꺼번에 따낸 것이다. 당시 김주희는 경기 뒤 정문호(50) 관장에게 큰절을 올렸다. 이어 “관장님은 내가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11년째 지도하고 계신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소개했다.

체육관 찾은 중학생

“돈 걱정 말고 나와라”

발가락 골수염 수술

“한번만 더해 볼게요”

3대 복싱기구 MVP


내년 스승과 석사과정

■ 1999년 12월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이었다. 언니가 다니던 거인체육관에 언니의 운동복을 찾으러 갔다가 정 관장과 처음 대면했다. “그렇게 예쁜 애가 들어올 수가 없었어요.”(정 관장) “거짓말 …. ㅎㅎ.”(김주희 선수)

1년 뒤, “어디서 봤다 싶은 아이가”(정 관장) “한 달 정도 다녀 볼 심산으로”(김주희) 체육관을 다시 찾았다. 한 달 5만~6만원의 회비는 언니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줬다. 네 살 터울의 언니는 편찮으신 아버지와 이혼하고 재가하신 어머니를 대신한 김주희의 후견인이었다. 하지만 서너 달이 지나면서 회비를 낼 수 없었다. 그때 정 관장은 “돈 걱정하지 말고 나오라”고 했다.

정 관장은 운동만 가르친 게 아니었다. 영어단어 시험을 봐서 100점을 맞으면 2000원씩 용돈도 줬다. 틈만 나면 “만화책이라도 좋으니 책을 많이 읽으라”고 권했다. 정 관장에게는 김주희와 동갑내기 딸이 있다. 김주희는 “관장님은 좋은 책이 나오면 두 권을 사서 저와 따님에게 한 권씩 선물했다”고 했다.

■ 2004년 12월 김주희는 국내 여자선수 1호로 프로복싱 자격증을 땄다. 프로에 데뷔한 김주희는 승승장구했다. 국제여자복싱협회(IFBA)와 세계복싱협회(WBA), 여자국제복싱협회 세계타이틀을 잇따라 거머쥐었다.

하지만 그 무렵 그의 오른발 엄지발가락은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시뻘건 독이 올라 허벅지까지 퉁퉁 부었다. 발가락 골수염이었다. 고열로 식은땀을 흘리며 수술대에 올랐다. 마취가 풀리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다. 정 관장은 ‘너무 가여워 이제 복싱 그만 시켜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김주희를 휠체어에 태우고 공원으로 나갔다. 정 관장이 한마디 했다. “우리 이제 그만하자.” 김주희는 울먹이며 말했다. “딱 한 번만 더 해보겠다”고.

재활에 들어갔다. 정 관장은 3층 체육관까지 김주희를 업고 다녔다. 수술 환자에게 좋다는 미꾸라지 보양식도 해먹였다. 그리고 마침내 재기에 성공했다.

■ 2009년 12월 김주희는 올해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세계 여자프로복싱 역사상 처음으로 5개 기구 챔피언 벨트를 휘감아 본 선수가 됐고, 연말에는 3대 복싱기구의 ‘올해의 선수’에 잇따라 선정됐다. 김주희는 “집안 형편이 넉넉했거나 어머니가 계셨다면 복싱을 못했고, 관장님도 못 만났을 것”이라며 ‘운명’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정 관장은 “김주희가 나를 만난 게 행운이 아니라 김주희 같은 제자가 있다는 게 나에겐 큰 행복”이라고 했다.

거인체육관은 정 관장의 선친 고 정석재 선생이 1959년 설립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복싱체육관이다. 정 관장은 가업을 이어받았고, 챔피언급 제자만 30~40명을 길렀다. 김주희는 그중 유일한 세계챔피언이다. 김주희는 내년 2월27일 한 체급을 내려 미니플라이급(47.6㎏) 3대 기구 통합 챔피언에 도전한다.

정 관장은 김주희의 ‘은퇴 이후’까지 생각하고 있다. 그는 “교수까지 시키려고 한다”고 했다. 김주희는 내년 2월 중부대 엔터테인먼트학과를 졸업한다. 이미 경희대 체육교육학과를 졸업한 정 관장도 올해 김주희가 다니는 학과에 4학년으로 편입했다. 둘은 내년에 중부대 인문산업대학원 교육학과에서 나란히 석사 과정을 밟는다.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운 꿈이 무르익고 있다.

글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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