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선언’ 김승현이 농구팬에게
지난 15일 코트를 떠난 김승현(36·사진·전 프로농구 삼성 가드)이 최근 <한겨레>에 은퇴에 대한 심경을 밝혔다. 그의 동의를 얻어 농구팬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농구팬 여러분, 안녕하세요? 김승현입니다. 그동안 사랑해주시고 질책도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5년 전 동국대 재학 시절엔 제가 하는 농구가 프로에서 통할까 반신반의했었죠. 비주류 대학을 나왔고 인맥도 없어 신인드래프트 3순위로 동양 오리온스에 뽑힐지 상상도 못했어요. 정말 놀랐고 기분 좋았지만 겉으론 내색 안 했죠. 전 입으로 떠드는 스타일이 아니라, 농구로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첫 시즌은 최고였죠. 팀 통합우승에 포인트가드로서 받을 수 있는 모든 상을 받았어요. 최우수선수는 서장훈 형과 경합을 벌였는데, 나중에 ‘절친’이 되었답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형과 조용히 듣는 걸 잘하는 저의 코드가 맞았거든요.
프로 첫 시즌때 MVP 다퉜던
장훈이 형과는 절친으로 지내
2002아시아대회는 만화 같았죠
디스크 파열·이면계약 파문…
코트 서는 게 행복이란 것 배워
은퇴식은 정중히 거절합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중국과의 결승 역전승은 정말 만화 같은 순간이었죠. 결정적인 가로채기를 해내는 순간 제정신이 아니었고, 뭔가 신이 들린 듯했어요. 그냥 (중국팀 실수가) 다 보였고, 편안했죠. 여유와 자신감이 온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그때 영상을 수없이 다시 봤는데 제 얼굴 표정을 보면 전혀 주눅 들지 않았죠. 이상민 형이 5반칙 퇴장당했지만, 형 대신 나가면 경기를 뒤집을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어요. 중국 선수들은 절 몰랐기 때문에 ‘히든 카드’였습니다. 형들이 정말 잘했고 전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요. 동양의 전성기 때 김승현이 잘나간 건 마르커스 힉스 덕이라는 얘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라 클라크, 안드레 브라운과도 재미있는 농구를 했어요. 힉스와는 2대2 공격(픽앤롤)을 많이 했지만, 다른 선수들과는 속공(런앤건)을 하면서 미친 듯이 득점을 했죠. 거의 맨날 100점대 점수를 냈어요. 요즘 프로농구를 보면 50~60점대 경기가 많은데, 우승이 지상 목표가 되니 수비 위주의 농구로 변한 거예요. 팬들은 공격적이고 시원시원한 농구를 원하는데, 틀에 박힌 패턴만 하니 선수들 기량도 떨어지고 있어요. 농구대잔치 시절엔 개인기 좋고 화려한 선수들이 얼마나 많았나요. 미국프로농구(NBA) 진출도 생각해 봤지만 신체 조건이 너무 달랐습니다. 2004년 시즌이 끝나고 시카고에서 마이클 조던을 비시즌에 훈련시켰던 트레이너와 한 달 넘게 같이 연습한 적이 있었어요. 드웨인 웨이드, 주완 하워드 등 엔비에이 스타들과 함께 연습경기도 했죠. 그들은 제가 상대하기엔 확실히 달랐어요. 하지만 패스만큼은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받았죠. 현역 엔비에이 최고 가드 중 한 명인 웨이드는 제 패스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답니다. 2007년 10월18일은 운명을 바꿔놓은 날입니다. 모비스와의 시즌 개막전이었는데 경기 중 뭔가 이상했어요. 허리 디스크에 문제가 생기면 특유의 느낌이 있거든요. 그날 밤 자기공명영상(MRI)을 찍었는데 디스크가 터져 있었어요. 이충희 감독님이 새로 오시면서 정말 열심히 운동했는데 몸에 과부하가 걸렸던 거죠. 그 이후 성적이 곤두박질치고 이면계약 문제까지 터지게 됐는데…. 어린 마음에 구단이 어떻게 약속을 어길 수 있나 화가 났었어요. 다시 농구를 하게 된 이유는 돈보다 명예를 택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돈에 미쳤다면 10억원이 넘는 거액을 끝까지 받아냈을 거예요. 코트를 다시 밟으니 마음이 편했고, 돈으로 살 수 없는 행복이라는 걸 깨달았죠. 선수생활 마지막에 잘하지 못한 건 정말 아쉽습니다. 굴곡 심한 농구 인생이었지만, 바닥으로 떨어진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해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선수든, 얄밉게 농구 했던 선수든 팬들에게 기억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삼성에서 은퇴식을 해준다고 해도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화려하게 시작했지만 마무리는 조용히 하고 싶어요. 언젠가 지도자로 코트에 돌아올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그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정리 이재만 기자 appletree@hani.co.kr
장훈이 형과는 절친으로 지내
2002아시아대회는 만화 같았죠
디스크 파열·이면계약 파문…
코트 서는 게 행복이란 것 배워
은퇴식은 정중히 거절합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중국과의 결승 역전승은 정말 만화 같은 순간이었죠. 결정적인 가로채기를 해내는 순간 제정신이 아니었고, 뭔가 신이 들린 듯했어요. 그냥 (중국팀 실수가) 다 보였고, 편안했죠. 여유와 자신감이 온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그때 영상을 수없이 다시 봤는데 제 얼굴 표정을 보면 전혀 주눅 들지 않았죠. 이상민 형이 5반칙 퇴장당했지만, 형 대신 나가면 경기를 뒤집을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어요. 중국 선수들은 절 몰랐기 때문에 ‘히든 카드’였습니다. 형들이 정말 잘했고 전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요. 동양의 전성기 때 김승현이 잘나간 건 마르커스 힉스 덕이라는 얘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라 클라크, 안드레 브라운과도 재미있는 농구를 했어요. 힉스와는 2대2 공격(픽앤롤)을 많이 했지만, 다른 선수들과는 속공(런앤건)을 하면서 미친 듯이 득점을 했죠. 거의 맨날 100점대 점수를 냈어요. 요즘 프로농구를 보면 50~60점대 경기가 많은데, 우승이 지상 목표가 되니 수비 위주의 농구로 변한 거예요. 팬들은 공격적이고 시원시원한 농구를 원하는데, 틀에 박힌 패턴만 하니 선수들 기량도 떨어지고 있어요. 농구대잔치 시절엔 개인기 좋고 화려한 선수들이 얼마나 많았나요. 미국프로농구(NBA) 진출도 생각해 봤지만 신체 조건이 너무 달랐습니다. 2004년 시즌이 끝나고 시카고에서 마이클 조던을 비시즌에 훈련시켰던 트레이너와 한 달 넘게 같이 연습한 적이 있었어요. 드웨인 웨이드, 주완 하워드 등 엔비에이 스타들과 함께 연습경기도 했죠. 그들은 제가 상대하기엔 확실히 달랐어요. 하지만 패스만큼은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받았죠. 현역 엔비에이 최고 가드 중 한 명인 웨이드는 제 패스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답니다. 2007년 10월18일은 운명을 바꿔놓은 날입니다. 모비스와의 시즌 개막전이었는데 경기 중 뭔가 이상했어요. 허리 디스크에 문제가 생기면 특유의 느낌이 있거든요. 그날 밤 자기공명영상(MRI)을 찍었는데 디스크가 터져 있었어요. 이충희 감독님이 새로 오시면서 정말 열심히 운동했는데 몸에 과부하가 걸렸던 거죠. 그 이후 성적이 곤두박질치고 이면계약 문제까지 터지게 됐는데…. 어린 마음에 구단이 어떻게 약속을 어길 수 있나 화가 났었어요. 다시 농구를 하게 된 이유는 돈보다 명예를 택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돈에 미쳤다면 10억원이 넘는 거액을 끝까지 받아냈을 거예요. 코트를 다시 밟으니 마음이 편했고, 돈으로 살 수 없는 행복이라는 걸 깨달았죠. 선수생활 마지막에 잘하지 못한 건 정말 아쉽습니다. 굴곡 심한 농구 인생이었지만, 바닥으로 떨어진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해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선수든, 얄밉게 농구 했던 선수든 팬들에게 기억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삼성에서 은퇴식을 해준다고 해도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화려하게 시작했지만 마무리는 조용히 하고 싶어요. 언젠가 지도자로 코트에 돌아올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그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정리 이재만 기자 appletr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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