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구 국가대표 정영식(24)이 5일 경기도 안양 호계체육관에서 소속팀 훈련을 마치고 기자와 만나 바둑을 두고 있다. 정영식은 바둑 애호가로 잘 알려져 있다. 사진 권승록 기자
바둑판을 앞에 두고 정영식(24·미래에셋대우)이 초반 포석에 골몰했다. 화점(바둑판에 찍힌 9개의 점)에서 ‘날 일’(日) 자로 지켜갈 것인가, ‘눈 목’(目) 자로 달려갈 것인가. 날일자 행마는 실리와 수비에 유리하나 세력을 만들기 어렵고, 눈목자 행마는 그 반대다. 득실을 따져본 뒤 정영식은 날일자를 택했다. “제 탁구와 맞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정영식은 실리파다. 세력을 이용해 대마를 잡아 낙승을 거두기보다 변과 귀를 지키면서 계가로 이끄는 접전을 선호한다.
지난 5일 경기도 안양 호계체육관에서 기자와 만나 반상대결을 벌인 한국 탁구대표팀 정영식은 바둑판에서 눈을 좀처럼 떼지 못했다. “한 칸 더 가도 되느냐”는 물음을 “발빠른 행마지만 엷은 바둑이 될 수 있다”는 말로 돌려주자 “그럼 느리더라도 두텁게 가겠다”며 지키는 바둑을 택했다. 정영식의 탁구 스타일도 마찬가지다. 그는 실리형 탁구를 추구한다. 이에 ‘정영식의 수비 탁구는 한계가 있다’는 비판도 많았다. 그러나 그는 2016 리우올림픽에서 중국의 아성을 넘보며 실리형 탁구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그가 본보기로 삼은 선수는 중국의 장지커(세계 4위)다. 정영식은 “런던올림픽 때 장지커의 플레이를 보고 나와 비슷한 점이 많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장지커도 정영식처럼 포핸드보단 백핸드가 주무기다. 너끈한 승리보단 안정된 탁구를 선호한다는 것도 정영식과 유사하다. 정영식은 이번 리우올림픽 단체 4강전 1단식에서 장지커를 운명처럼 만났다. 방패와 방패의 대결. 이미 사흘 전 세계 1위 마룽(중국)을 상대로 개인단식 16강전에서 명승부를 펼치며 중국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정영식이었다. 그래서였는지 경기 전 장지커는 워밍업장에서 훈련 파트너에게 연신 백핸드 공격을 부탁했다. 정영식의 주무기를 의식했던 것이다. 정영식은 장지커에게 접전 끝에 비록 2-3으로 졌지만 중국은 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기가 끝난 뒤 마룽은 정영식을 찾아왔다. 경기장에선 서로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지만 경기장 밖에선 “여자친구가 있느냐”며 사적인 대화를 할 정도로 이들은 친한 사이다. 마룽은 정영식의 어깨를 두드리며 “정말 많이 성장했다. 경기하면서 많이 놀랐다”고 말했다. 정영식은 “세계 1위에게 인정받아 기분이 정말 좋았다”고 돌아봤다.
메달을 목에 걸지 못했지만 정영식은 “올림픽을 전후해 일상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했다. 귀국 뒤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고 청와대 만찬과 야구장 시구를 포함해 각종 환영행사도 줄을 이었다. 그는 “가장 신기하고 재밌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변화”로 두가지를 꼽았다. 훈련장(경기도 안양)과 집(경기도 의정부)을 오가며 이용했던 지하철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생겼다는 점과 티브이(TV)를 통해서만 접하던 스포츠 스타들을 올림픽에서 직접 만날 수 있었던 것. 유명세를 얻기 전 정영식은 “스포츠 스타들이 너무 멋있어서 언젠가 만나보고 싶었다”고 했다.
정영식은 “올림픽 이후 탁구가 더 재밌어졌다”고도 했다. 지난해 최고의 한 해를 보내며 세계순위를 12위까지 끌어올렸던 정영식은 이번 올림픽 전까지만 해도 이상하리만치 연패를 거듭해 “올림픽이 끝나면 탁구를 그만둘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는 리우올림픽 이후 180도 달라졌다. “올림픽은 준비가 힘든 만큼 그 짜릿함이나 얻어가는 소득도 큰 것 같다”는 그는 “2020년 도쿄올림픽에선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팀의 주축이 돼서 꼭 금메달을 목에 걸고 싶다”며 웃어 보였다.
그는 지난 1일부터 소속팀으로 복귀해 여느 때처럼 훈련을 소화하기 시작했다. 한바탕의 환영이 마무리되고 그 역시 일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주거니 받거니, 어느덧 정영식과의 반상대결도 종반을 향했다. 가장 민첩한 움직임이 필요한 탁구선수가 가장 정적인 두뇌운동에 푹 빠져 있다니…. 처음엔 의아했지만 정영식의 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 칸 차이로 바둑은 판이 완전히 달라지잖아요. 탁구도 그래요. 상대의 서브를 어느 곳으로 받아내느냐에 경기가 좌우됩니다. 아주 작은 차이죠. 승부처에서의 결정적 한 방을 위해 초반에 손해를 감수하는 것도 그렇고요.” 이날 바둑 승부의 결과는? 쉿! 비밀이다.
권승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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