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우 한국여자농구연맹(WKBL) 총재 한겨레 자료사진
지난 6월15일 오전 10시께(현지시각) 프랑스 낭트 트로카디에르 경기장 앞에서 만난 신선우(60) 한국여자농구연맹(WKBL) 총재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2016 브라질 리우올림픽 여자농구 최종예선 C조 벨라루스와의 2차전을 1시간 반 앞둔 시점이었다. 신 총재의 얼굴이 어두웠던 건 전날 열린 1차전에서 나이지리아에 1점차로 분패하며 한국의 8강 진출이 사실상 어려워진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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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우 총재…처음부터 책임회피 급급 신 총재에겐 그보다 더 급박한 일이 있었다. 경기 시작 4시간 전, 검찰은 2015~2016시즌에 혼혈선수 자격으로 한국에서 뛴 첼시 리(27·전 KEB하나은행)가 특별귀화를 위해 법무부에 제출한 출생증명서 등이 조작됐다고 발표했다. 부모 또는 조부모 중 한 명이 한국인이면 한국에서 뛸 수 있다는 해외동포선수 규정의 허점을 노려 첼시 리 쪽이 서류를 조작한 것이 이날 밝혀진 것이다. 첼시 리의 선수 자격에 대해선 시즌 전부터 여러 구단에서 숱하게 문제제기를 했음에도 이를 최종 승인한 WKBL 수장 입장에선 눈앞이 캄캄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총재로서 책임 있는 조처를 기대했던 현지 기자단에게 신 총재는 “여러 의견을 일단 수렴해보겠다”는 답변만을 되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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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은 첼시 리 사태에도 선전 거듭 경기 직전 언론 보도로 첼시 리 사태를 접한 대표팀 선수들은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첼시 리는 지난 시즌 신인왕을 포함, 6관왕에 오르며 소속팀 정규리그 2위와 챔피언결정전 준우승을 이끌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결과가 사기극이었다는 걸 대표팀 선수들은 잔인하게도, 올림픽 본선행을 좌우할 가장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알게 됐다. 그럼에도 대표팀은 나이지리아보다 세계순위가 32계단 높은 벨라루스를 1점차로 꺾고 8강에 진출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이에 대한농구협회까지 급해졌다. 서둘러 대표팀 출국일을 20일로 연기했다. 애초 협회는 대표팀의 8강 진출이 사실상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해 16일로 출국 일정을 잡았다.
선수들은 8년 만의 올림픽 본선 진출을 고대하며, 최종예선 6일간 5경기를 치르는 강행군을 이어갔지만 이들을 현지에서 지휘하는 WKBL 총재는 프로스포츠 사상 유례없는 일을 초래하고도 책임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다. 15일 WKBL은 검찰 발표 이후 보도자료 한 장으로 사과를 갈음했다. WKBL보단 되레 KEB하나은행의 대응이 더 신속했다. 이날 KEB하나은행은 사과문을 발표하고 장승철 구단주가 물러났다. 2년 재계약을 마쳤던 박종천 감독도 자진사퇴했다. 구단 입장에선 불가피한 수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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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들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WKBL 비록 올림픽 본선행에는 실패했지만 대표팀이 최종예선에서 보여준 투혼은 국민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동안 여농(여자농구)에 관심이 없었는데 이번에 팬이 됐다’는 응원이 프랑스 현지로 날아들었다. 때문에 이번 최종예선은 그간 침체됐던 여자농구가 다시 부흥할 수 있는 절호의 계기가 될 거란 기대가 선수단에 감돌았다. 그러나 WKBL이 이후 첼시 리 사태를 수습해가는 과정은 그런 농구팬들의 기대를 차례로 무너뜨렸다.
검찰 발표 20일이 지난 뒤 신 총재는 이사회(7월5일)를 열고 “첼시 리의 기록과 시상 내용을 취소하고 WKBL에서 첼시 리를 영구제명하며 하나은행의 지난 시즌 성적 말소 및 상금 환수는 물론이고 2016~2017시즌 외국인 선수 및 신인 드래프트에서 하나은행에 최하위 순번을 배정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WKBL의 책임은 어디에도 적시하지 않았다. 이사회 발표만 놓고 보면 ‘첼시 리 혈통 사기극’의 거의 모든 책임은 구단의 몫이었다. 이사회 직후 신 총재는 “연맹의 책임에 대한 논의는 있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아 이후 재정위원회나 기타위원회에서 논의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보름 뒤 열린 재정위원회(7월19일)에서도 WKBL은 책임있는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재정위원회는 시즌 중 발생하는 사안에 대해 논의하고 이를 총재에 보고하는 총재 산하 자문기구다. 여자농구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초유의 사태에 대해 WKBL과 총재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권한이 애초에 없다. 그렇게 검찰 발표 1달이 넘도록 WKBL은 차일피일 책임 발표를 미뤘다. 이후 지금까지 첼시 리 건에 대한 이사회 소집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이사회 이외에도 WKBL은 팬들 앞에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일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지난달 24일엔 타이틀스폰서식이, 하루 뒤인 25일엔 2016~2017 여자프로농구 개막 미디어데이가 있었다. 개막 전에 팬들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와 책임 있는 후속 조치를 발표할 수 있는 사실상의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신 총재는 이 자리에서도 “최종예선에서 대표팀이 선전했고 대형신인(박지수)도 가세해 여자농구가 다시 인기를 얻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을 뿐 첼시 리 사태에 대한 언급은 일절 하지 않았다. 지난 21일 WKBL은 <한겨레>에 "우리도 최선을 다했지만 사상 초유의 일이라 안타깝게 생각한다"면서 "이 사태에 대해 총재를 포함해 내부 임직원에 대한 징계는 없었다"고 밝혔다. 첼시 리는 현재 불가리아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이 건은 첼시 리가 한국으로 들어와 검찰 조사를 받지 않아 현재 ‘기소중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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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기로 일관하는 WKBL...막후엔 최경환이
첼시 리 사태에 왜 연맹은 버티기로만 일관하는 걸까. ‘기소중지’ 상태로 이 사태가 마무리될 가능성이 높고 WKBL의 정치적 배경도 든든하기 때문인 걸까. 신 총재는 제6대 WKBL 총재(2012년 7월~2014년 6월)를 지낸 최경환 새누리당 의원의 후광으로 제7대 WKBL 총재(2015년 7월~)자리에 앉았다. 신 총재는 최 의원이 총재에 부임할 때 WKBL의 전무이사 자리에 올랐다. 2014년 6월 최 의원이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로 지명되자 최 의원은 남은 임기 1년을 반납하고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그 자리를 신 총재가 직무대행 자격으로 총재직을 수행했다. 물론 그 전해인 2013년 6월 최 의원이 새누리당 원내대표에 선출될 때부터 연맹은 사실상 신선우 체제로 돌아가고 있었다. 신 총재가 여자농구계에서 ‘신’으로 불리는 이유다. 최 의원은 여전히 WKBL 명예총재로 남아있다. 최 의원은 지난달 29일 여자농구 개막전에도 신 총재와 함께 농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최 의원의 정치적 영향력은 그의 전 수석보좌관이자 매제이기도 한 장병화 한국기업데이터 상임감사가 현재 WKBL의 고문직을 맡고 있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장 상임감사는 농구 관련 경력은 전무하지만 연맹의 유일한 고문 자리에 올라있다. 그는 금융권 경력 역시 없음에도 현 정권의 실세인 최 의원과 가까워 2014년 9월부터 한국기업데이터 상임감사에 내정됐다. 자연히 ‘낙하산’ 논란이 일었지만 현재까지 한국기업데이터의 유일한 상임감사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장 상임감사는 첼시 리 사태가 터진 이후 신 총재와 미국으로 건너가 상황을 검토했을 정도로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다.
첼시 리 사태 이후 여자프로농구 6개 구단이 WKBL의 책임을 묻는 강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6개 구단은 모기업이 모두 은행과 보험사다. 박근혜 정권의 최고 실세이자 ‘경제통’인 최경환 의원이 여전히 명예총재로 버티고 있는 WKBL에 금융권 산하 구단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건 어려운 일이다. 첼시 리와 연관된 구단이든 아니든 ‘신뢰’가 생명인 금융권 입장에선 ‘혈통사기극’은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다.
박종천 전 KEB하나은행 감독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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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감독 무리하게 기용한 KBSN 첼시 리 사태가 터진 이후 3~4곳의 언론매체에서 WKBL의 책임을 묻는 기사를 냈지만 WKBL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그렇게 서서히 첼시 리 사태는 잊혀져가는 듯했다. 그러다 이 문제가 다시 불거진 것은 박 전 KEB하나은행 감독이 <케이비에스엔>(KBS N Sports)스포츠 해설위원으로 4개월만에 복귀하면서부터다. 박 전 감독은 감독 재직 중에 사석에서 자신이 직접 미국에서 첼시 리를 영입해온 것에 대해 흡족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숙의 시간을 갖기보다 4개월만에 팬들과 직접 만나는 여자프로농구 해설위원으로 복귀했다. 농구계에 20여년간 몸담은 한 인사는 “안 그래도 여자농구가 침체기인데 왜 이 시점에 나와서 다시 논란을 일으키는지 모르겠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WKBL은 중계권만 팔면 그만인 것일까. 리그 전체를 총괄하는 WKBL이 주관방송사와 논란의 여지가 큰 문제에 대해 충분히 교감하지 못한 부분은 여전히 아쉬운 대목이다.
그러나 박 전 감독은 21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난 평생 농구계에 몸담은 사람이다. 농구장이 아닌 다른 어디로 가겠나. 질 높은 해설로 보답하겠다”며 말을 아꼈다. 신 총재와 박 전 감독은 연세대 선후배 관계로 6년간 현대와 KCC에서 감독과 코치로 호흡을 맞췄던 사이다.
박 전 감독의 이른 복귀에 대해 <케이비에스엔>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형편이다. <케이비에스엔>은 여자프로농구 주관 방송사다. 물론 박 전 감독에겐 법적 책임은 없는 상태라 고용엔 문제가 없다. 검찰 공소장엔 박 전 감독이 첼시 리의 서류 조작에 가담했다고 적시돼있진 않다. 그러나 도의적인 책임까지 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숙의 시간을 충분히 갖기도 전에 섣부르게 박 전 감독을 해설위원으로 영입한 것을 두고서 농구계 안팎에서 시선이 곱지 않다. <케이비에스엔> 관계자는 “팬들의 비판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해설위원 풀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 박 전 감독만큼 풍부한 경험을 갖고 편안한 해설을 해줄 수 있는 분을 찾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박 전 감독은 하나은행 내규에 따라 올해 연말까지 하나은행의 자문위원직을 유지하며 보수를 받기로 돼 있다. 중립이 필수인 해설위원이 특정 구단의 보수를 받고 일하는 셈이다. <케이비에스엔>는 “이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고 밝혔다. 박 전 감독은 주위의 비판에도 지난 16일 KB-우리은행 전에 해설위원으로 데뷔했고 이어 20일 KDB생명-우리은행 전도 중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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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BL 수뇌부는 변해야한다 취재 과정에서 수많은 농구관계자들부터 “여자농구가 그렇지 않아도 인기가 떨어지고 있어 걱정인데 이런 기사가 나가면 더 악영향이 있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를 많이 들었다. 2016 브라질 리우올림픽 여자농구 최종예선이 열린 프랑스 낭트 현지에서 직접 눈으로 확인한 한국여자농구는 그 가능성과 투혼에서 적잖은 감동을 주었던 터라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WKBL은 이같이 훌륭한 선수들을 뒷받침할만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판단 하에 취재를 지속했다. 지금의 수뇌부는 자리 보존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 한국여자농구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WKBL은 수뇌부부터 변해야 한다. 프랑스 현지에서 선수들로부터 전해들은 WKBL과 대한농구협회에 대한 불만은 이보다 훨씬 많았다는 걸 두 단체는 잊지 말길 바란다.
권승록 기자
ro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