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핸드볼 국가대표 정유라(대구시청)가 지난 11일 서울 올림픽공원 에스케이(SK)핸드볼경기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대한핸드볼협회 제공
지난해 8월30일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여자핸드볼 결승전. 한국이 중국을 29-23으로 꺾고 금메달을 따냈을 때 주역은 베테랑 김온아(31·SK)나 류은희(29·부산시설공단)가 아니라 ‘비밀 병기’ 정유라(27·대구시청)였다.
정유라는 팀내 최다인 8골을 넣으며 대표팀의 새로운 에이스로 떠올랐다. 당시 에스엔에스(SNS)에서는 정유라를 ‘갓유라’로 부르며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한때 최순실씨 딸과 이름이 같아 농담을 걸어오는 사람도 많았지만, 어느덧 ‘갓유라’라는 별명으로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정유라가 지난해 6월 서울 올림픽공원 에스케이(SK)핸드볼경기장에서 열린 2018 서울컵 국제핸드볼대회에서 스웨덴을 상대로 슛을 날리고 있다. 대한핸드볼협회 제공
지난 11일 오후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에스케이(SK)핸드볼경기장에서 만난 정유라는 “발이 아주 빠른 것도 아니고, 힘이 좋은 것도 아니고, 키(1m70)도 애매하고, ‘한방’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세울 만한 장점이 없다”며 몸을 낮췄다.
그러나 지나친 겸손이다. 그의 소속팀 대구시청 황정동 감독은 “순간적인 센스와 타이밍이 탁월한 선수다. 무엇보다 아침, 저녁으로 개인운동을 하루도 거르지 않는 성실성이 정유라의 장점이다. 타고난 천재가 아니라 후천적 노력파”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활용 가치도 높다. 왼손잡이인데다 라이트윙(사이드)과 라이트백(주공격수)을 다 맡을 수 있는 전천후 선수다. 그가 핸드볼을 시작한 계기도 왼손 덕분이었다. 부산에서 태어나 경남 진주에서 자란 정유라는 진주 금산초등학교 4학년 때 핸드볼부 코치가 “왼손잡이 손들어 보라”는 말에 손을 번쩍 들었다. “원래 운동을 좋아했어요. 그런데 그땐 태권도가 더 재밌었어요.”
그가 본격적으로 핸드볼에 ‘꽂힌’ 것은 마산 양정여중에 들어가서다. “딱 일주일만 다시 해보자”는 코치의 권유로 다시 공을 만졌고, 그때부터 승승장구했다. 마산 무학여고 시절 주니어 국가대표로 선발됐고, 고3 때 국가대표 상비군에 발탁됐다. 만 19살이던 실업 1년차 때는 꿈에 그리던 태극마크를 달았다. 2011년 브라질 세계선수권대회였다. 이듬해 2012 런던올림픽에선 ‘인생 경기’를 펼쳤다. 약관의 스무살 선수는 프랑스와의 조별리그 경기에서 주공격수로 거침없이 날았다. “그땐 정말 두려울 게 없었던 것 같아요.”
정유라가 지난 11일 서울 올림픽공원 내 에스케이(SK)핸드볼경기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대한핸드볼협회 제공
그러나 호사다마였을까. 경기 막바지에 그만 무릎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당시 한국 선수들의 줄부상 대열에 하필 그도 동참하고 만 것이다. 그래도 그땐 세계 4위에 오르는 저력을 과시했다.
4년 뒤 2016 리우올림픽은 기억하기 싫은 상처가 됐다. 당시 베테랑 우선희 대신 라이트윙으로 투입된 그는 한국 여자핸드볼 사상 처음으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쓴맛을 봤다.
그는 대표팀에서 라이트백 자리를 놓고 선배 류은희와 주전경쟁을 해야 한다. 라이벌로 생각할 법하지만 그는 손사래를 쳤다. “라이벌이라뇨. 다른 선수를 견제하기보다 저를 발전시키는 데 더 힘을 쏟아야죠. 굳이 라이벌을 꼽는다면 제 자신이 라이벌입니다.”
정유라는 자신의 롤모델로 소속팀 선배이자 전 국가대표 최임정(38·은퇴)을 꼽았다. “왼손잡이 라이트백으로 포지션도 같고, 한때 룸메이트였는데 임정 언니한테 특히 멘털 관리를 많이 배웠다”고 했다.
어느덧 실업 10년차에 접어든 정유라는 대표팀에서 꾸준히 활약했지만 소속팀엔 미안함을 내비쳤다. 중요한 국제대회를 마치고 소속팀에 복귀하면 고질적인 오른무릎 부상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는 “10년 동안 4번이나 수술을 했다”며 “대표팀 경기는 거의 다 뛰었는데 소속팀에 기여하지 못한 게 늘 죄송하다”고 했다.
그는 올해 두가지 목표가 있다. 핸드볼코리아리그에서 소속팀 대구시청이 4월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것과 9월 중국에서 열리는 아시아 예선에서 2020 도쿄올림픽 티켓을 따는 것이다.
강재원 여자대표팀 감독은 “티켓은 한 장 뿐이다. 중국과의 싸움인데, 홈 텃세가 심할 것 같다”고 했다. 정유라는 “그때까지 몸을 잘 만들어서 반드시 도쿄에 가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눈은 2019를 넘어 2020으로 향하고 있다.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