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 내세운 보복, 양심이 허락하는 ‘카타르시스’
왕따 겪은 유대인들 ‘팔’ 학살, 피가 피를 부른다
‘나도 때론 때려부숴버리고, 죽도록 패고 싶다. 그리고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다.’
아! 이런 느낌, 얼마만인가. 내 안에서 깊이 잠 자고 있는 그런 분노와 살인의 욕망을 거울처럼 보여주는 예술 작품을 만난 것이. 내가 어제 밤 본 영화는 예술영화 렛미인(Let me in)이다. 예술영화다. 지난번 상당한 수작으로 추천했던 비투스가 3만명의 관객이 들었는데, 렛미인은 8만명이 보았다니, 예술영화치곤 대단한 흥행인 셈이다.
제작사가 소개한 영화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눈 내리던 밤 소년, 소녀을 만나다
빛이 사라지면, 너에게 갈게. 전세계를 매혹시킨 슬픈 사랑 이야기.
못된 아이들의 괴롭힘에 시달리는 외로운 소년 오스칼은 어느 눈 내리던 밤, 창백한 얼굴을 한 수수께끼의 소녀 이엘리를 만난다. 둘은 곧 서로에게 하나밖에 없는 친구가 되고, 어느 새 가슴 설레는 감정이 싹튼다. 하지만 이엘리의 등장 이후 마을에서 피가 모두 사라진 채 죽임 당하는 기이한 사건이 계속되고, 비상한 두뇌의 오스칼은 그녀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눈치 채는데…
이런 설명을 무색하게 영화는 시종일관 잔혹하기 그지 없는 공포로 이어진다. 좀 더 내용을 보충하자면 소년 주인공 오스칼은 이혼한 엄마와 단둘이 사는데, 학교에서 불량배들에게 이지메를 당하는 왕따다. 엄마는 오스칼이 이지메를 당하는지도 잘 알지 못할만큼 무신경하다. 오스칼은 외톨이다.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하던 오스칼은 어느날 밤 집 앞 공터에 나가 나무에 칼을 박는다. 자신을 이지메한 아이들을 죽이고픈 욕구를 나무에 대고 분출하는 그 앞에 한 소녀가 나타난다. 옆집에 아빠와 단둘이 사는 이엘리다. 이엘리는 그런 추위에도 반팔을 입고 있다. 뭔가 이상한 힘이 느껴진다. 이엘리는 오스칼에도 “너도 누군가를 죽이고 싶구나?”라고 묻고, 오스칼은 이를 긍정한다. 이엘리는 자기가 당한만큼 갚아줘야만 다시 당하지 않는다고 말해준다.
그 뒤 마을에서 사람들이 한 둘씩 죽어간다. 살인자는 사람들을 기절시켜 나무에 거꾸로 매단 뒤 칼로 목을 따서 피를 받아간다. 이엘리의 아빠다. 이엘리의 아빠는 뱀파이어에 감염돼 오직 피를 먹어야만 살 수 있는 딸을 위해 그렇게 사람을 죽여 피를 구한다. 이엘리의 아빠는 어느날 학교에 침입해 한 아이의 피를 받으려다 들킬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정체가 들통나지 않도록 얼굴에 염산을 뿌려버린다. 얼굴이 만신창이가 된 채 누워있는 아빠가 있는 병원 7층 중환자실로 벽을 타고 표범처럼 올라가는 이엘라에게 아빠는 자신의 몸에 남은 마지막 피를 제공한 채 1층 바닥으로 떨어져 죽는다. 아빠도 죽고 이엘라는 집에 혼자 남겨진다. 피를 구해줄 아빠도 없고, 피도 자신이 구해야 한다.
왕따 오스칼과 외톨이 이엘라는 벽을 통해 서로 교신하면서 교감한다. 오스칼에겐 이엘라 뿐이고, 이엘라에겐 오스칼 뿐이다. 오스칼엔 이엘라가 뱀파이어이며, 여성 성기도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유일한 마음의 창구인 이엘라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뱀파이어는 햇빛을 보면 몸이 불타버리기 때문에 낮엔 채양막으로 닫힌 욕탕 속에 들어가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누워있다가 밤이 되면 활동을 개시한다. 이엘라에게 여자친구를 잃은 마을 아저씨가 이엘라를 죽이기 위해 이엘라의 집으로 들어가 욕탕에 있는 이엘라를 죽이려는 순간 오스칼은 이엘라를 깨워 이엘라는 그 아저씨를 오히려 죽여버린다.
이엘라로부터 용기를 얻은 오스칼은 늘 자신을 이지메하던 코니에게 막대를 휘들러 귀를 멀게해 버린다. 그러자 코니는 악당같은 형을 데려오고 그 형은 수영장에 있는 다른 아이들을 모두 내보낸뒤 혼자 남은 오스칼의 머리채를 잡은 채 물 속에서 3분 동안 버티고, 그렇지않으면 들고 있던 칼로 눈알을 빼버리겠다고 한다. 악당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물 속에서 허우적대며 거의 죽어갈무렵 물 속엔 악당의 잘린 목과 코니 일당의 잘린 팔들이 보인다. 이엘라가 나타나 사랑하는 오스칼을 구하고, 악당들의 목과 팔을 잘라버린 것이다.
미국 최고의 비평사이트인 토튼 토마토에서 100점 만점
이런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해 영화보급사는 ‘전세계를 매혹시킨 슬픈 사랑 이야기’라고 홍보했다. 이 영화는 ‘냉정하고 가차 없는 평가로 소문난 미국 최고의 비평사이트인 토튼 토마토에서 100점 만점이런 놀라운 기록을 세우며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전세계 최고 권위 8개 영화제에서 12개상을 수상했으니 상당한 평가를 받은 셈이다. 배급사는 ‘액션이나 블록버스터 작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남성 관객들의 아낌없는 사랑이 두드러져 남녀노소를 뛰어넘는 감동을 증명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사랑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본능을 그려낸 작품으로 보았다. 굳이 인간의 본성을 성악설이라고 주장할 건 없지만, 많은 인간들에게 파괴적인 본능이 숨어 있다. 다른 사람을 죽여 피를 마심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뱀파이어에게만 그런 본능이 있는 것이 아니다. 끝없이 이지메를 당하면서도 한마디 항거도 못하는 오스칼도 실은 자신을 이지메시킨 아이들을 죽이고 싶어서 어두운 밤 마을 앞 공터에서 불량소년을 투사시킨 나무를 향해 사정 없이 칼을 꽂는데서 보여지듯이.
명분 위해 칼 드는 게 아니라 파괴 본능 위해 명분 찾는 지도…
자신의 ‘가족’이나 ‘사랑’, ‘국가’, ‘민족’, ‘종교’를 위한다는 명분이 생긴다면 그런 파괴는 아주 쉽게 정당성을 얻는다. 이엘라의 아빠가 자신의 딸을 위해 마을 사람들의 멱을 따도, 오스칼이 자신의 사랑 이엘라를 위해 마을 아저씨를 죽음으로 몰아넣어도, 이엘라가 자신의 사랑 오스칼을 위해 소년악당들의 목과 팔을 단칼에 날려버려도 그것은 눈물 겨운 사랑의 행위가 된다.
어찌보면 많은 이들이 가족이나 사랑, 국가, 민족, 종교를 위해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파괴적 본능을 정당하게 펼칠 수 있는 명분인 가족과 사랑, 국가, 민족, 종교를 찾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이 영화의 제목인 ‘렛미인’(Let me in)은 ‘들어가게 해달라’ 또는 ‘초청해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뱀파이어는 누군가가 초청해주지않으면 방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란다. 아무도 환영하지 않은 뱀파이어를 환대해준 오스칼을 위해 이엘라는 세상 사람을 모두 죽여서라도 그를 보호하려한다. 그런데 결국은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사람도 죽이고, 들어오게 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죽이니, 사랑이든 증오든 필연적으로 살해의 본능을 실현할 뿐이다.
사람들은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것을 히틀러 한 사람의 죄로 몰아세우려 애쓴다. 뱀파이어처럼 ‘이상’한 한 인간의 출현으로 그같은 엄청난 죄악이 저질러졌다고.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도저히 히틀러 한 사람이 저지를 수 없는 행위다. 유대인을 잡아들이면 그들이 죽는 것을 알면서도 피에 굶주린 뱀파이어처럼 다락방까지 뒤져 유대인을 찾아낸 수많은 독일인들이 있었고, 그들을 분류하고, 수송해 나르고, 폭력을 가하고, 가스실에 보내는 그 과정에 수십만 수백만이 함께 한 것이다. 넓게 보면 히틀러의 행위에 동조하거나 침묵한 대다수 독일의 지식인들과 언론인, 교회 목회자와 신부들도 이 파괴와 살해에 가담한 것이다. 히틀러를 암살하려다 죽음에 처해진 본훼퍼 목사와 같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유대인들에 대한 심판’은 그런 파괴와 살해의 본능이 정당성을 회복하는데 더할나위 없이 좋았는지 모른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인과응보는 인류의 파괴 본능을 정당화하는 좋은 장치였다.
죽이고 싶은 분노는 연민과 도덕 속에서 무의식 속에 숨어들어
보복은 시원하다. 당하지않고도 죽이고 싶은 본능을 지닌 이들에게 당한 것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돌려주는 것은 아무런 양심의 꺼리낌을 가질 필요가 없기에 더할나위 없이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주곤한다. 너는 마땅히 죽어야 할 놈이었기에!
선악으로 점철된 대결의 장에서 어리숙하게 당하지않을 것을 태어나서부터 요청받고 교육받는 어린아이들은 전쟁 영화같은 환타지를 갖고 있다. 마루치 아라치나 슈퍼맨이나 로버트 태권브이 같은 초능력적인 힘으로 적군을 단번에 싹쓸이해버리고 싶은 환타지를 꿈꾼다. 그러나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의 행동이 가져올 그 짧은 쾌감의 이면에 숨은 수많은 고통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폭탄 파편 속에 갈갈이 찢긴 이가 적군만이 아니라 그의 어린 자녀와 아내, 어머니의 가슴들임도 알게 되기에, 죽이고 싶은 우리의 분노는 그런 연민과 도덕 속에서 무의식 속에 숨어든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의 씨앗은 언제나 가족이나 사랑, 국가, 민족, 종교 같은 물이나 햇볕을 만나면 싹트게 언제나 싹이터서 두터운 동토를 뚫고 미사일처럼 발사될 태세를 갖추고 있다.
인도에 온 유럽 여행객들이 9·11테러 TV 화면 보며 환호성
6~7년 전 인도를 여행할 때였다. 한 스님으로부터 미국 뉴욕의 무역센터가 오사마 빈라덴의 테러로 일거에 붕괴된 9·11테러 당시의 경험을 들었다. 갑자기 밖에서 환호성 소리가 들려서 무슨 일인가고 뛰쳐나가보았더니, 유럽에서 온 여행객 수십명이 마치 자기나라 월드컵팀이 결정적인 골이나 넣은 것처럼 만세를 부르고 있더라는 것이다. 알고 보니, 텔레비전에서 미국 무역센터가 붕괴되는 장면을 보고서 환호성을 지른 것이었다. 무려 3천여명이 단숨에 목숨을 잃은 그 참사를 보면서. 자신의 땅에선 아무런 전쟁도 하지않으면서 한반도에서, 베트남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라크에서 지구상 수많은 곳에서 전쟁을 벌이며 어린아이들의 컴퓨터 전쟁게임처럼 미사일을 발사해온 미국인들에게 ‘너희들도 한번 당해보니 어쩌냐’는 그 카타르시스가 작동했던 것이었을까.
‘들어가게 해달라’(렛미인)는 요청 받아준 팔레스타인들을 저토록…
나라를 잃고 유럽을 떠돌면서 제발 ‘렛미인’(Let me in·들어가게 해주세요)라고 애원했던 유대인들은 왕따를 당하고 끝내 수백만명이 유태인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하는 악몽 같은 일을 겪었다. 그들에겐 악몽이었지만 많은 이들에게 악을 해소하는, 또는 자신의 본능 속에 꿈틀대는 살인의 욕망을 해소하는 카타르시스의 과정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많은이들이 그 살인의 대열에 동참하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그토록 고통 받으며 땅 한평 없이 이국을 떠돌던 유대인들은 배은망덕하게도 2차대전 뒤 제발 ‘들어가게 해달라’(렛미인)는 자신들의 요청을 받아준 팔레스타인들을 요즘 저토록 잔혹하게 죽이고 있다.
아! 이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 유대인들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할 것인가. 유대인들이여! 이스라엘이여! 죽이고 싶고, 파괴하고 싶은 수많은 인간의 본능을 더는 이상 깨우지 말기를.
조현 종교명상전문기자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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