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타
인디언 추방 ‘과거’와 아마존 파괴 ‘현재’도 함께
우주의 ‘깨달은 자’ 착취는 신에 대한 도전 상징?
이명박 대통령이 제15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하기위해 덴마크 코펜하겐에 도착한 17일 국내 극장에선 일제히 <아바타>가 개봉돼 상영됐다.
이 대통령은 더 이상 지구를 위기로 빠뜨려서는 안된다며 공존을 위한 노력을 촉구했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그 사이 <아바타>의 스크린은 ‘우주의 암적 존재, 인간의 환경 파괴’ 실상을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이번 총회를 이끄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과학자들은 우리가 기후변화를 막을 시간이 10년도 채 남지않았다고 한다”면서 “최악의 상황을 막을 시간이 많지않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아바타>에선 이미 지구의 자원이 모두 고갈돼 머나먼 행성으로 대체에너지를 찾아떠난 지구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무공해 별 땅 밑 대체에너지 겨냥해 위장 침투
<터미네이터>와 <타이타닉>으로 이미 영상 테크놀로지의 첨단 기법을 개척해온 제임스 카메론 감독(55)이 3D(Three Dimensions, Three Dimensional·3차원) 컴퓨터그래픽을 동원해 환상적인 영상으로 꾸민 <아바타>는 지구가 아닌 머나먼 별 ‘판도라’의 얘기다. 판도라는 나비족들이 식물과 동물과 교감하면서 자연과 하나로 살아가는 별이다. 무공해의 아름다운 판도라엔 ‘바이러스’나 다름 없는 별종이 도착했다. 나비족들은 그들을 ‘하늘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부르지만, 그들은 지구의 에너지가 고갈되자 나비족들이 사는 땅 아래에 잠자고 있는 ‘언놉타늄’이라는 대체에너지를 노리고 이곳에 온 지구인들이다.
자연 속에서 살아온 판도라의 나무는 백층 건물보다 높고, 동물들도 크고 활기차다. 거기서 살아가는 나비족들도 키가 기린처럼 늘씬하고 날렵하고 빠르다. 물론 언어도 지구인들과는 다르다. 그래서 판도라에 진출한 지구전사 부대가 나비족들과 소통하기 위해 생각해낸 게 아바타다. 나비족처럼 생긴 모형을 만들어, 거기에 인간 의식을 집어넣어 그들과 소통하려는 것이다.
그 인물로 뽑힌 게 주인공인 전직 해병대원 ‘제이크 설리’(샘 워딩튼)다. 하반신 마비자인 제이크 설리가 캡슐 속에 들어가면 그의 의식은 ‘그의 아바타’로 옮겨진다. 이를테면 의식은 제이크 설리이고, 몸둥이는 나비족 청년인 아바타다. 달릴래야 달릴 수 없고, 뛸래야 뛸 수 없는 하반신 마비자 제이크 설리는 자기 마음대로 달리고 뛸 수 있는 몸둥이를 갖게 되자 마치 어린아이처럼 기뻐 날뛴다. 판도라의 ‘지구인 주둔 기지’에선 제이크에게 나비족에 침투해 들어갈 것을 명한다.
기법은 ‘매트릭스’·‘반지의 제왕’ 차용, 스토리는 ‘늑대와 춤을’ 닮아
동료들과 함께 정글로 들어가 신기한 식물들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있다가 집채만한 동물에게 쫓기던 제이크는 정글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중 표범같은 정글 동물의 공격을 받아 죽을 위기에 처한다. 그때 제이크는 자신을 구해준 나비족 처녀 ’네이티리’(조 샐다나)를 만난다. 네이티리를 따라 나비부족 마을까지 따라가고, 결국 네이티리에게 나비부족 언어와 나비부족의 삶을 배우게 된다.
네이티리를 따라 언어 뿐 아니라 동식물과 교감하는 ‘침묵의 언어’까지 익히는 제이크는 익룡처럼 커다란 새인 이크란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을만큼 뛰어난 나비족 전사가 된다. 그런 과정에서 제이크는 네이티리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지구인 주둔 기지에선 자신들이 그 마을 땅바닥을 파헤칠 수 있도록 하루빨리 나비족들을 이주시킬 것을 제이크에게 명령한다. 그러나 애초 협상할 내용이 아니다. 협상이란 뭔가 서로 주고받아야 한다. 하지만 나비족들은 지구인들에게 바라는 게 없다. 그러나 지구인들은 나비족이 오래도록 살아온 삶의 근거지를 내놓을 것을 요구한다. 나비족들의 아름답고 성스런 삶에 매료된 제이크는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지구인 전사들은 그 새를 못참고 거대한 불도저(통상 불도저보다 100배정도 크게 보이는)를 앞세워 정글을 헤치면서 침공해 들어오며 거대한 전쟁이 시작된다.
<아바타>영화에 도입된 첨담 기법들은 예전의 영화에서 조금씩 차용해온 듯하다. 인간을 원격조종하는 것은 <매트릭스>(1999년 키아누 리브스 주연작품)에서 원격조정에 의해 다른 세계로 가서 활동하는 것과 비슷하다. 거대한 동물들의 질주와 익룡 이크란의 비상은 <반지의 제왕>에서 눈에 익은 것들이다. 또 스토리에서는 <늑대와 춤을>(1991년 작품)에서 1863년 주인공 존 덴버 중위가 인디언구역에 홀로 발령나 지내면서 인디언 수우족과 친해져 그들의 땅을 차지하고 인디언들을 쫓아내려는 백인들과 맞서 인디언들과 함께 싸우는 내용과 유사하다.
영화로도 있었고 실제로도 벌어지고 있는 상황
하지만 그런 가공영화들의 조합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내내 내 마음을 차지한 것은 이 영화와 너무도 유사한 한 실제 상황이었다.
아마존의 우와족에 대한 얘기였다. 우와족은 안데스 산맥 깊은 곳 코바리아 강 근처 숲에서 뭇 생명들과 함께 살아왔다. ‘우와’라는 말은 ‘생각하다’, 또는 ‘명상하다’는 뜻이다. 그들은 침묵의 고요를 유지하는 명상과 노래와 의식을 통해 고유한 영성을 유지해왔다. 우와족은 1년에 한번씩 몇 달은 전 부족이 함께 굶는 단식을 한다. 더 이상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그들이 수확한 식량만으로 전 부족이 1년 동안 살아가기 위해 여름 한철은 단식을 하며 명상을 한다는 것이다.
그처럼 자연의 벗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땅을 미국의 다국적 석유회사 옥시덴탈 페트롤륨이 콜롬비아 정부의 허가를 받아 석유개발에 나섰다. 우와족들이 사는 곳의 땅 속에 매장된 석유를 개발하기 위해 우와족을 쫓아낼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 개발이 이뤄지면 그들의 땅이 송두리째 파헤쳐지고, 우와족의 삶의 터전은 지상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자본과 권력의 폭력 앞에 주저앉을 수 없는 우와족들은 마침내 남다른 결정을 하기에 이른다. 만약 ‘인류의 어머니인 대지를 파헤칠 경우 우와족 5천명 전원이 절벽에 떨어져 자살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 우와족을 살리기 위해 제2의 존 덴버 중위와 제이크와 같은 환경운동가들이 나서서 다국적기업의 석유개발은 일시적으로 중단됐지만, 다시 다국적기업은 콜롬비아내의 하수인들을 시켜 간접적인 개발에 나섰다. 2005년에 아마존의 벌목꾼들로부터 농민들을 지켜오던 노트르담 수녀회의 도로시 스탱 수녀가 아마존 파괴자들이 보낸 살인 청부 업자들에 의해 총을 맞고 숨진 것에서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구 파괴의 실상을 알 수 있다.
인간은 과연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 각 나라에서 이제 아마존과 히말라야까지 파헤쳐 지구를 파멸로 몰아넣는데서 과연 끝날까. 토성, 목성,화성, 금성, 천왕성,해왕성,명왕성,그리고 판도라별까지…. 인류의 야욕이 멈출 수 있을까.
이명박 대통령이 코펜하겐에서 공존을 역설한 오늘도 우리나라에선 여전히 거대한 한강 낙동강 영산강 금강을 파헤치는 거대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아바타는 산스크리트어로 ‘깨달아 뜻대로 사는 자’
영화 <아바타>가 보여준 것은 첨단기법의 영상과 전쟁만이 아니다. 무지의 깊은 늪에 빠져 자신의 피를 오염시키고 자신의 살을 썩게 해 결국 자기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무지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래서 <아바타>는 현대판 <장자>다.
아바타(Avatar)란 산스크리트어로 ‘깨달아 뜻대로 사는 자’를 말한다. 내가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란 책에서 소개한 해리팔머의 의식개발프로그램의 이름이기도 한 ‘아바타’는 폭력심과 파괴심과 정복욕과 같은 무지한 감정의 노예가 아니라 그로부터 벗어나 천연(天然)의 본성을 구현하는 대승 보살의 삶을 말한다.
의식을 아바타로 옮기기 위해 캡슐 속에서 누에고치처럼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제이크는 하반신 마비자인 자신인가, 거침없이 정글을 달리는 나비족 청년 아바타가 자신인가, 과연 어느쪽인 진짜 자신인가하고 묻는다. 꿈 속에서 나비가 되어 날다가 잠에서 깬 장자가 장자가 나비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장자가 된 것인가하고 묻는 것과 같다.
어느쪽이 과연 본래 인간인가. 우리는 과연 천하를 내 품으로 안는 장자의 ‘대붕’이었을까. 오직 자기밖에 모르는 메추라기였을까. <아바타>는 편가르기와 적은 이익을 탐하면서 얻는 이기적 욕망이 가져다주는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붕의 큰 기쁨을 엿보게 한다.
제이크는 익룡 이크란 중에서도 왕초여서 누구도 타기를 두려워하는 그레이트 리오놉테릭스를 탄다. 사욕과 사적인 감정을 버린 인간의 능력은 끝이 없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서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이 다른 갈매기들이 도토리 키재기 경쟁에 열을 올리는 사이 한계를 딛고 광속으로 비상하며 대자유를 만끽하는 것과 같다. 높이나는 새는 멀리 보지만, 멍청한 짐승은 제꼬리를 물기 위해 온종일 뱅글뱅글 돌다 지쳐 쓰러진다.
동쪽 산이 물 위로 간 까닭은
<아바타>가 암시하는 것은 장자의 대붕만이 아니다. 영화 <아바타>에선 기암괴석이 있는 산이 그냥 허공에 떠있다. 무엇엔가 의지해서만 지탱하는 중력의 법칙을 거스른다.
운문 선사에게 한 제자가 “부처가 어디에서 생겨났느냐”고 묻자 “동쪽 산이 물위로 간다”고 답했다. 산이 어떻게 물위로 흘러가며 강이 어떻게 산위로 흐를 수 있겠는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무(無)와 공(空)의 경지에 가 닿아 비가 구름이 되고, 강이 되고, 강이 땅이 되고 땅이 산이 되고, 결국은 이것이 곧 그것이며, 네가 곧 나인 이치에 도달하지 않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다.
무에서 와서 무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런데도 내 주머니에 지구를 몽땅 집어넣고, 저 숱한 별들까지 주워담으려 한다. 아 무겁다.
하여 빈몸으로 대붕 위에 올라타 아바타처럼 한번 날아볼꺼나.
조현 종교명상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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