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산책] 민다나오② 대표적 분쟁지 탕갈
반군 총사령관 시장돼 협정 맺고 낙원 회복 실험
기독교도와 공존…살인의 총에서 평화의 총으로
민다나오에서 한국인 사업가 한명이 괴한에게 납치됐다는 보도를 16일 아침 접했습니다. 한국인이 납치됐다는 곳은 저희 취재팀이 경유했던 말라위이고, 납치된 시점도 저희가 그곳에 갔던 때와 비슷한 때입니다. 그래서 더욱 놀랐습니다. 실은 말라위는 무슬림 구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쪽에 있는 도시여서, 민다나오에서도 그렇게 위험한 곳으로 분류되지는 않는 곳입니다. 하지만 현지인들도 말라위를 지나 무슬림구역으로 깊숙히 들어가는 것은 아예 기피합니다. 저희 취재팀이 들어간 곳은 말라위를 지나서, 무슬림 구역 가운데서도 가장 위험한 곳으로 알려졌던 탕갈이었습니다.
탕갈은 민다나오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분쟁지역입니다. 저와 이경주 피디·박종찬 기자는 제이티에스 민다나오 대표인 도동-트레시 부부와 최기진, 최정연 간사와 함께 탕갈로 향했습니다.
민다나오 주도 가갸안데오로에서 자동차로 4~5시간 동안 달리니 북쪽 라나오 델 노르떼지역이었습니다. 멀리 북쪽 해안과 코코넛 숲이 어우러진 절경이 펼쳐졌습니다. 탕갈마을로 접어드는 입구에 오자 우리를 태우고 간 운전기사가 “탕갈은 너무도 위험한 지역이어서 들어갈 수 없다”며 진입을 거부했습니다.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의 근거지로,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총격전이 계속되고, 납치와 살해가 빈번했던 분쟁지역의 대명사 가운데 하나이니 운전기사의 거부감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오인 사격 막기 위해 경찰서장 오토바이 앞세우고 들어가
차에서 내려 탕갈시 부시장의 차로 갈아타고 탕갈마을을 향해 들어섰습니다. 탕갈시 경찰서장이 오토바이를 타고 200미터쯤 앞서갔습니다. 경찰서장이 먼저 가는 것은 숲에 숨어 길 쪽으로 총구를 겨누고 있는 무슬림 반군들이 차를 향해 오인사격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앞선 경찰서장 외에도 완전무장한 경찰이 밖에서 지키는 차를 타고 30~40분간 험한 비포장도로를 지났습니다. 취재진 가운데 박종찬 취재·영상팀장은 위험을 무릅쓰고 차 밖에서 완전무장한 경찰들과 함께 서서 촬영하는 투혼을 발휘했습니다.
한참을 가다보니 총을 든 외눈박이 민병대원이 차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차 안에서 영상카메라로 촬영하고 있던 이경주 피디는 그 외눈박이 민병대원의 총구를 보는 순간 “소름이 끼친다”면서 화들짝 놀랐습니다. 그 민병대원 뒤로 빅마니실초등학교가 보였습니다. 학교 마당에선 수십명이 놀거나 산책 중이었습니다. 학교 마당은 아이들 뿐만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놀이터 같았습니다.
학교 한쪽에선 사람들이 학교를 짓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우리를 바라보던 무슬림들의 눈에선 외지인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의 빛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함께 간 제이티에스(JTS) 실무자들을 본 마을 사람들이 경계심을 풀고 다가오고, 아이들은 천진스럽게 장난을 걸어오며 웃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의 천진함은 어디를 가나 어찌나 똑같은지요. 그래서 무엇에도 물들지 않은 아이들을 천사에 비유하는가 봅니다.
이 마을사람들은 제이티에스의 지원을 받아 학교를 증축하고 있었습니다. 탕갈은 모두 18개 바라가이(읍·면·동 단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초등학교는 4개뿐이라고 합니다. 이 학교도 너무 작아 1~3학년까지밖에 없어 고학년들은 10리도 넘는 다른 학교로 다녀야 합니다.
멀리 푸른 파도 넘실대고 열대과일 널린 아름다운 숲
멀리 태평양의 푸른 파도가 넘실대고 코코넛등 열대 과일이 즐비한 아름다운 숲 탕갈엔 애초 수만 명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빗발치는 총알을 피해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갈 만큼 탕갈은 저주의 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로이슬람해방전선의 총사령관이었던 아포둘라지스 바팅고로가 2002년 탕갈 시장에 당선돼 정부군과 평화협정을 맺은 뒤 마을을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군에게 악명 높던 반군지도자가 전쟁을 끝내고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바팅고로 시장은 “아직도 외부에선 탕갈을 위험하다며 오려고 하지 않지만, 여러분들이 이곳에 들어왔고, 또 아무 일 없이 나갈 수 있다는 것보다 확실한 평화의 증거가 있느냐”면서 “우리는 평화를 회복하고, 살기 좋은 땅을 만들어가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 학교 건축현장 기술자 가운데는 앙리 도마크 날이란 이름의 기독교인도 함께 일하고 있었습니다. 국지전이 발생했을 때 서로 죽이고 죽이는 살상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평소엔 기독교인들과도 평화롭게 함께 일하며 지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실제 탕갈의 한 마을에선 기독교인 네 가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슬림들이 이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게 아니라, 산에서 잡은 멧돼지(무슬림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음)를 기독교인들에게 갖다 주기도 한답니다.
탕갈에 평화가 찾아오면서 8천명으로 줄었던 탕갈 인구가 1만6천여 명으로 두 배나 늘어났습니다.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바팅고로가 시장으로 재임한 6년 동안 줄줄이 돌아왔습니다.
분쟁의 상처 속에서 평화를 피워내는 곳 탕갈.
위험하다며 함께 안 간 운전기사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고학년용 학교건물을 짓는 데 너도나도 앞장서던 사람들은 “이곳이 우리 아이들이 꿈을 가꾸고 키울 곳”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3학년까지만 다니고 학업을 포기했던 잘 생긴 소년 쥬나이 바산델란(15)도 “새 건물이 지어지면 남은 학업을 마치고 경찰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총을 든 경찰을 부러운 듯 바라보는 그의 말에 “무엇을 위해?”라고 묻자 정부군이나 기독교인들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마닐라와 민다나오 사람들조차도 사시의 눈으로 바라보는 탕갈의 무슬림들은 평화와 행복을 바라는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장난기 어린 웃음을 나눠주었던 아이들의 얼굴을 분노와 증오가 채워지지 않기를, 그리고 평화와 행복이 가득한 낙원을 회복하기를 빌면서 탕갈을 나왔습니다. 함께 탕갈로 들어가기를 거부했던 운전기사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냐는 듯 쳐다보았지만, 탕갈의 무슬림들은 내게 ‘위해’를 끼치기는커녕, 인간의 본성에 대한 믿음을 더해주는 축복을 안겨주었습니다.
배경음악에 담긴 뜻
배경음악은 앙리코 마시아스의 <녹슨 총>입니다. 앙리코 마시아스는 1938년 북아프리카의 프랑스령 알제리에 있는 킁스탕틴이란 마을에서 스페인 안달루시아 출신 아버지와 프랑스 남부 프로방 태생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의 알제리는 프랑스가 강점해 온 이후로 불과 100만 남짓한 프랑스인이 정치적, 경제적 실권을 장악해 대부분이 무슬림인 원주민은 불합리한 지배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무슬림들은 마침내 무장해방군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는데 앙리코 마시아스가 초등학교 교사로 있던 20살 때 무슬림무장해방군에 의해 어머니와 누이를 잃었고 장인마저 암살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증오로 돌리기보다는 평화를 희구하는 노래로 승화시켰습니다. 이 <녹슨 총>은 그런 노래입니다.
‘북을 치는 이 세상에서/누가 사랑보다 전쟁을 더 좋아할까요?/녹슨 총보다 멋진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그리고 그것은 이젠 결코/이젠 결코 소용이 없을거예요.’
총이 사라질 이 세상을 갈구하는 앙리코 마시아스를 노래를 들으며 총칼 없는 평화의 땅 탕갈을 위해 다시 한번 기도의 마음을 보냅니다.
민다나오(필리핀)/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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