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님 글방] 원철스님 ‘도시의 미아’
12월이다. 벌써 서울에서 네 번째로 한 해를 마감하니 이제 누가 ‘수도승’이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하겠다. 수도승은 ‘수도(修道)하는 승려’라는 뜻이 아니라 이를 패러디한 ‘수도(首都)에 사는 승려’를 가르키는 우리들만의 은어(隱語)이기도 하다. 원효스님은〈발심(發心)〉이라는 글에서 ‘시정(市井:대도시, 당시에는 경주였을 것이다)은 수행자가 살 곳이 아니다’라고 후학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출가자가 도시에 머물 수 밖에 없는 사정을 십분 감안하더라도 ‘수도승’을 바라보는 평범한 보통 대중들의 눈길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탐탁치 않다.
사진과 실물 일치하는 최영미 시인에 ‘경이로움’
작년 이맘 때 쯤 이수문학상 시상식에 자리를 함께 했다. 수도에 사는 까닭에 수상자인 소설가와의 오랜 인연 때문에 하객으로 자리를 함께한 것이다. 그 때 시 부문은 최영미 시인이 차지했다. 보통 실물보다도 사진이 과장되기 마련인데 그녀는 그렇치 않았다. 사진과 실물이 일치하는 그 자체가 나에게는 경이로움 이었다. 사진만큼이나 미인이었고 게다가 또 늘씬했다. 초청자인 소설가 보다도 덤으로 만나게 된 시인 쪽으로 눈길이 더 오래 머물렀다.
그녀의 출세작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시집을 오래 전에 읽었다. 그 때 나는 산중에서 풀옷 빳빳하게 먹인 광목옷을 입고 살았다(지금은 세탁하기 좋은 화학섬유 옷이다). 그 책은 이미 출간된지 몇 년이 지난 뒤였다. 내 나이가 불혹을 바로 앞둔 12월인지라 그 제목 자체가 매우 큰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아! 이렇게 30대의 화려한 잔치가 끝나고 이제 불혹에 접어드는구나’ 하는 그런 아쉬움을 단 한 마디로 대변해주는 ‘어록’이었던 것이다.
마땅히 산에 있어야 어울리는 승려지만, ‘안도감’ 준 시
그로부터 또 십여년이 흘렀다. ‘수도승’으로 시상식에 참여한 후 벽장에 나뒹굴고 있던 그 시집을 다시 찾아냈다. 그리고 찬찬이 읽어내렸다. 새로운 내용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녀는 대도시를 시 속에 끌어들이는 탁월한 안목을 보여주고 있었다. 농경과 자연적 정서만이 시가 되는줄 알았더니 도시도 시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과감하게 시도하여 모두에게 내보였던 것이다.
“아스팔트 사이에서/겨울나무 헐벗은 가지 위에/ 새가 집을 짓는구나/된 바람 매연에도 아랑곳않고 사람사는 이세상 떠나지 않고/ 아직도/ 정말 아직도 집을 짓는구나”
대도시 서울을 시의 언어로 확실하게 장악하는 내공을 보여 준 것이다.
마땅히 산에 있어야 어울리는 승려이지만 도시에 있어도 괜찮을 것 같은 그런 안도감을 나에게 주었다. 사는 곳이 바뀌니 시를 보는 관점 역시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가기 마련인가 보다.
막차 타고 서울역 내리니 대중교통 뚝…한시간 택시 줄 서다 터벅터벅
며칠 전 막차를 타고 상경했다. 자정을 훨씬 넘겨 서울역에 도착하니 모든 대중교통은 이미 끊어진 상태였다. 함께 열차를 타고 온 이들은 전화로 가족이 운전하는 차를 불러내고 있다. 나는 불러 낼 사람도 또 올 사람도 없다. 새삼 혼자임을 다시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택시정류장은 이미 100미터가 넘는 긴 줄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별 수 없이 맨 뒤에 섰다. 한 시간이 지나도 50미터가 남았다. 밤이 깊어 갈수록 택시는 더욱 드문드문 온다. 이러다가 새벽녘이 되어야 내 차례가 올 것 같았다.
더 참지 못하고 그동안 줄서 기다린 시간이 아깝긴 했지만 용감하게 대열을 이탈했다. 춥긴 했지만 걸어서 조계사까지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지하도에 들어서니 노숙자들이 진을 치고 있다. 승복자락의 내 모습을 보고서 도움의 손을 벌리는 이와 한순간 눈이 마주쳤다. 이럴 때는 나도 도시의 미아일 뿐이다. 애써 외면하고 빨리 걸었다. 지하도는 길고도 길었다.
낮과 달리 잠든 도심은 시인의 표현 그대로 헤프거나 과묵하게
사람도 별로 없고 차도 별로 없는 도심은 낮의 그 분주하고 복잡한 그 도시가 아니였다. “어디에서건/ 헤프게 모로 누운 산이 보이고 과묵한 빌딩들은/오직 높이로만 구분될 뿐이다”라는 그 시인의 표현 그대로 였다. 큰길은 전답처럼 넓고 길게 끝없이 펼쳐져 있고, 빌딩들은 연이은 산처럼 우뚝하게 서있고, 골목길은 계곡물을 연상케 해준다. 가끔 삼삼오오로 길가에 서있는 취객들마저 사람이 귀한 탓에 더 정겨워 보인다.
조계사는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쌩 하고 지나친 노숙자 눈빛 생각 나
조계사는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있었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길 모퉁이를 도니 극락전 지붕처마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절마당으로 들어서니 대웅전 불빛이 훤했고 철야기도하는 소리가 가득하다. 도심의 절 역시 여느 빌딩처럼 한밤중에도 깨어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돌리고 나니 쌩하고 지나친 그 노숙자의 눈빛이 생각났다. 순간 부끄러운 마음이 일어났다.
법안선사와 어떤 납자가 이런 문답을 주고 받았다.
“찬바람이 일면 가난한 이는 어디에 의지합니까?”
“은혜를 알면 은혜를 갚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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