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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벗님글방

수행자들의 건강까지 염려한 ‘퓨전토굴’

등록 2009-12-10 19:16

[벗님글방/원철스님]

수행공간 ‘굴’과 휴식공간 ‘집’ 조합한 청허방장

 

 

‘토굴’이란 말 자체에서 주는 어감은 때론 팽팽한 긴장감으로 다가오고 때론 느긋함이 함께하는 이중성을 가진다. 그것으로 인하여 대중생활을 하는 출가자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살아보기를 꿈꾸는 이상향 같은 곳이다. 내로라하는 선지식들은 토굴에서 밤낮을 잊은 용맹정진의 결과로 수행경지가 한 차원 높아진 경우가 많았다. 또 너무 애쓴 나머지 상기병(上 氣 病) 등 건강을 잃은 경우에도 토굴에서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의 쉼터로 삼아 후일을 다짐하곤 했다.

 

20년 뒷바라지한 스님 토굴에서 내쫓은 할머니

 

‘파자소암(婆子燒庵:노파가 암자를 태우다)’이란 공안에서 보듯 토굴 정진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중국 당나라 때 수행하는 납자에게 사재를 털어 토굴까지 마련해주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뒷바라지하던 할머니가 있었다. 그니 역시 일심(一心)을 늘 유지한지라  만만찮은 내공이 쌓여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스님의 공부경지가 별볼일없다는 사실을 나름대로 확인하게 되었다. 20년 동안 공들였던 정성이 헛된 짓이었음을 알고는 너무 화가 나서 그를 내쫓고 말았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자 씩씩거리며 그 암자마저 불태워버렸다. 이 사건은 널리 알려진 토굴에 관한 대표적 일화라고 하겠다. 보아하니 이 토굴은 소박한 집의 형태를 띠고 있었을 것이다.  

 

‘안정토굴’로 알려진 성철스님의 천제 굴은 볏짚을 이은 세 칸짜리 초가집이었다. 6.25 직후 통영 안정사에 잠시 머물게 되었는데 큰절 주지 스님에게 양해를 구해 인근의 호젓하고 양지바른 곳에 별도로 지은 토굴이었다. 성불을 위해 용맹정진할 공간을 마련해놓고는 역설적으로 ‘부처가 될 수 없는 집’이라는 뜻의 천제굴(闡提窟)이란 이름을 붙였다. 원로 사진가 주명덕 선생의 1988년 작품집인 〈포영집〉에 이미 집은 오래전에 없어졌고 터만 남은 사진이 실려 있다. 따라서 제대로 지은 집이 아니라 얼기설기 지은 것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토굴은 소박한 집의 형태가 주종이지만 그 어원에서 보듯 처음에는 진짜 흙굴 내지는 동굴이거나 바위굴인 경우도 더러 있었다. 원효스님의 〈발심수행장〉은 대표적인 토굴예찬론이라 할 수 있다.  “높은 산과 험한 바위가 있는 곳은 지혜 있는 수행자가 살 곳(高嶽峨巖 智人所居)”이라고 암굴(巖窟)을 찬탄하였는데 대화상의 토굴은 바위굴이었다.

  

  조향암혈(助響巖穴)로 위염불당(爲念佛堂)하고 

  배슬여빙(拜膝如氷)이라도 무연화심(無戀火心)하며

  메아리 울리는 바위굴을 염불당으로 삼고(중략)

  절하는 무릎이 얼음같이 차더라도 불 땔 생각을 하지 않으며

 

원효스님도 목숨 건 토굴 수행

 

변산 개암사 뒷산에는 원효스님이 살았다는 ‘상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방(不思意房)’이란 바위굴이 전해온다. 당시에도 사다리를 타고서 올라갔다고 하였으며, 지금도 접근이 어려워 누구든지 아무 때나 함부로 가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곳에서 〈발심수행장〉을 저술했다고 전해져 오는데 그야말로 목숨을 건 정진의 공간이라고 하겠다. 토굴의 원형에 근접하는 처소였다. 

 

조선말 황사영(1775~1801)의 ‘백서’가 저술된 곳은 진짜 흙으로 만들어진 토굴이었다. 이 글은  1801년 신유박해의 내용을 나름대로 천주교 시각에서 기록한 것인데 길이 61㎝ 폭 38㎝, 한 줄에 110자 총 121행으로 도합 1만 3천 자를 먹으로 기록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극도의 형식주의만 남은 유교이념에 대한 지나친 개인적 분노가 바탕에 깔려 있었다. 그리하여 역사의식까지 매몰시켜 버린 탓에 나라와 민족보다는 종교적 신념에 지나치게 경도된 광신적 내용으로 인하여  ‘매국노의 글’로 비난받는 내용이 포함되긴 했지만 그 신심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 글은 옹기저장고로 위장한 토굴 속에서 8개월간 은신하며 수도하듯 완성했다고 전한다. 충북 제천시 봉양면에 가면 현대에 와서 복원한 토굴을 만날 수 있다. 

 

고전적 토굴인 바위굴 전면에 개량형 토굴이라 할 수 있는 소박한 집을 덧붙인 ‘퓨전토굴’인 청허방장(淸虛方丈)은 현재 남아있는 토굴건축의 종합판이라 하겠다.  바위굴이나 흙굴에서 수행할 경우 그 마음의 긴장감과 비장감이야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오래 머물기에는 여러가지로 무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후대에는 토굴이 소박한 집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청허방장은 바위굴과 집의 형태가 함께하는 독특한 모양의 토굴로 이름이 높다. 수행공간인 굴과 휴식공간인 집을 적절하게 조합한 까닭이다.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뒤에는 내가 너이구나

 

방장은 좌우 1장(丈) 크기의 소박한 방을 말한다. 묘향산 보현사의 금강굴에 위치하고 있는데 냉전시대 이후 이 토굴의 존재를 남쪽에 대중적으로 알려 준 사람은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 선생이다. 엄청나게 큰 바위 밑에 움푹 들어간 큰 공간을 이룬 곳에 모자차양 같은 지붕을 얹었고 양쪽에 기둥을 받쳐 일자집으로 지은 바위굴 암자이다. 높이 3m 길이 10m 너비 13m로 호젓한 수도생활에 제격이라 하겠다. 앞쪽에 긴 툇마루를 깔아 방두칸과 부엌칸을 연결시켜 놓은 것이 멋스럽고 또 오래 머물게 되더라도 건강을 염려하지 않아도 될만큼 집으로서의 기능도 함께 갖춘 ‘중도건축’이라 하겠다. 고졸한 문화적 아취까지 풍기는지라 ‘명품토굴’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고 하겠다.

 

밖에는 ‘청허방장’이란 현판글씨가 걸려 있고 안으로는 휴정선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어 역사성도 갖추었다. 게다가 선시인 영찬(影讚)을 고명처럼 얹어놓아 문학성까지 가미된 완벽한 성지인 셈이다.  

  

  팔십년전거시아( 八 十 年 前 渠 是 我 )더니

  팔십년후아시거( 八 十 年 後 我 是 渠 )더라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뒤에는 내가 너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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