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하 목사와 권포근 야생초 요리가. 조현 기자
텃밭 가의 풀을 예초기로 깎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농로에서 마주친 이장네 개구쟁이 막내 은재가 날 보더니 꾸뻑 인사를 하며 말했다. “아저씨 장화, 멋져부려요. 초록 풀물이 들어!” “오, 그래. 은재 눈이 보배로구나.” 오늘따라 의젓한 말을 건넨 은재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집을 향해 성큼성큼 걷는데, 길 위의 공기도 온통 풀 향기로 붐비는 듯 싶었다. 집에 돌아와 예초기를 내려놓고 쪽마루에 앉아 장화를 벗었다. 아직도 풀 향기가 물씬거리는 장화! 난 초록 물든 장화를 신발장에 그대로 올려두었다.
내가 밭에서 돌아왔는데도 아무런 기척이 없어 소리쳐 불렀다. “여보, 나 왔어요!” 역시 대답이 없다. 어디 외출한 거 같진 않아 ㅁ자 모양 집을 한 바퀴 돌아보니, 농사일에 맛들인 아내가 뒤란에서 밀짚모자를 꾹 눌러쓰고 호미로 밭을 만들고 있었다. 얼갈이배추 씨를 뿌릴 모양이었다. 그제야 인기척을 느낀 아내가 힐끗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보, 뒤란 텃밭이 완전히 지렁이 밭으로 변했어요.”
꿈틀대는 지렁이를 보면 악귀를 본 듯 소스라치던 그녀가 호미에 걸려 나오는 지렁이를 예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렁이에 대한 시선이 바뀐 그녀의 변화가 반가워 대꾸했다.
“누구는 지렁이를 자연의 정원사라 부르던데?”
사실 그동안 우리는 지렁이나 땅강아지 같은 생물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던 황폐해진 밭을 기름지게 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늦가을의 산에서 부엽토를 긁어 포대로 담아다 넣고, 아침마다 요강의 오줌을 쏟아붓고, 음식물 쓰레기를 허투루 버리지 않고 모아서 넣곤 했다. 그렇게 하기를 10여년, 마침내 지렁이들이 우글우글 붐비는 옥토가 된 것. 지렁이는 흙을 먹고 분변토를 토해내는, 지구를 살리는 예술가가 아니던가.
나는 호미를 달라고 해 씨앗 넣을 땅을 넓히는 일을 거들었다. 아내는 얼갈이배추 씨를 정성껏 뿌리며 중얼거렸다. “얘들아, 잘 싹틔우렴!” 귀농을 한 이후 우리는 씨앗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은 그 흔한 질경이 씨앗 한톨 만들지 못하지 않는가. <토지>의 작가 박경리는 자신을 일컬어 “씨앗을 닮으려는 사람”이라며, 씨앗이 함축하는 신비는 하느님의 신비라고 했다.
해질 무렵 나는 멍석에 펴 널었던 토종 홍당무 씨를 털었다. 지난가을에 심어 겨울을 나고 봄이 되어 꽃이 피고 씨앗을 맺은 홍당무. 난 잘 마른 씨앗을 모아 봉지에 담았다. 정말 작디작지만 이 씨앗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원천이 아닌가. 나는 이 씨앗을 값없이 선뜻 건네준 ‘토종씨앗 협동조합’에도 보내고, 주위에 필요로 하는 분들과도 나눌 생각이다. 토종씨앗을 나에게 무상으로 나눠준 이들처럼 나도 착한 종자은행이 되고 싶으니까.
소농(小農)의 하루가 이렇게 저물었다. 소소한 일들로 하루를 채웠으나 오늘 흙과 지렁이를 만지고 소중한 씨앗을 받은 시간은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꽃시간’이 아닌가. 생명의 주재께서 또 내일을 허락하신다면 향기로운 장화를 신고 살아있는 생명들과 소통하는 텃밭의 꽃시간 속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디리.
글 고진하/목사·시인·원주 불편당 당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