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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좋은글

귀신 나오는 집

등록 2011-09-25 10:48

부형의 고을살이에 따라가 있는 자제들은 술이나 고기 음악 여색 등의 유혹에 빠져 들지 않으면, 관청의 문서나 약속에 반드시 간여하게 된다. 심한 경우에는 차꼬를 채우고 채찍과 몽둥이질하는 것으로 눈이나 귀를 즐기면서 세월을 보낸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지방관이 되면 세 가지를 버린다고 한다. 첫째는 집을 버리고, 둘째는 종을 버리며, 자제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하니, 매우 탄식할 만한 일이다. 나는 예천에 도착하는 날부터 관 해 정 누의 제도를 살펴보고, 정각의 동쪽에 폐허가 되어버린 정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자 아래에는 조그만 연못이 있는데, 넓이가 사방으로 수십 보나 되고, 모두 섬돌로 되어 있었다. 연못 둘레에는 향기로운 온갖 화초가 많이 심어져 있고, 둥그런 울타리로 둘려 있었다. 그 가운데 조그만 문이 하나 있어서 정각으로 통하였다. 정자 뒤에는 키가 큰 대나무와 높이 솟은 나무들이 많았다. 창마다 붉은 색과 푸른 색으로 아름답게 칠해졌지만, 버려진 지가 오래 되었다. 곁의 사람들에게 그 까닭을 물었더니 "저 정자에는 귀신이 삽니다. (저 정자를 쓰는 사람은) 병을 얻든지, 아니면 놀라고 두려워서 잠을 못 자기 때문에 그만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귀신은 오로지 사람이 부르는 것이다. 내 마음에 귀신이 없으면 귀신이 어찌 스스로 오겠는가?"하였다.

그 다음날 아버지를 뵙고는 이렇게 말씀드렸다. "반학정은 그윽하고 조용해서 글을 읽고 시를 짖기 좋은 곳입니다. 정각과 거리도 좀 떨어져 있고, 빙 둘러 담으로 막혀 있어서 재판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참으로 자제가 지낼 만한 곳입니다. 오늘 반학정을 닦아 내고 쓸어 낸 뒤에, 침상과 이불을 옮기고 싶습니다."

아버지께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하고 말씀하셨다.

내가 이 정자에 머물면서 글을 짓다가 틈이 생기면, 책을 보는 데에만 뜻을 두었다. 사람들의 말로는 "귀신이 대들보에서 읊조리고 계단을 걸어다닌다."하더니, 너무나 고요해서 아무런 소리도 없고 자취도 없었다. 언제나 밝은 달이 물에 비쳐 그윽한 달빛이 문안으로 들어오고, 너무 그림자가 너울너울 움직이며 꽃 향내가 코를 찔렀다.

아침 저녁으로 부모님께 문안 드리고 남은 시간에는 이리저리 마음 내키는 대로 거닐다가, 경전을 열심히 읽었다. 저포놀이나 장기, 또는 노래하는 아이나 춤추는 계집처럼 사람의 마음과 눈을 어지럽히는 것들은 그 조그만 문 안으로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면 부모님께 근심을 끼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내 마음 속의 즐거움을 글로 써서 반학정기(伴鶴亭記)를 삼는다.

<다산 정약용 산문집>(허경진 옮김, 한양출판 펴냄)의 `반학정(伴鶴亭) 이야기'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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