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_ 수행, 수도, 명상을 통해 행복을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각박하고 외로운 현대인들의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 수도, 명상, 심리, 치유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공간이다. 밖에서 만 갈구하던 시선을 내면으로 돌려, 자기를 깨닫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함으로써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복잡한 현실에서 마음의 짐을 내려놓기 위한 생활의 구체적인 방법들을 휴심정을 찾는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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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치유수련회여러분 자신이 독수리다
병아리들 속의 독수리는 창공을 나는 독수리를 보면서 생각했습니다.'나도 저렇게 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는 다시 모이를 먹습니다.날아갈 생각도 못 합니다. 왜? 자신이 병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설거지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사람이오."
경기도 안성 산속의 사랑의교회 수양관 강당. 우리나라 '치유 목회'의 개척자인 크리스찬치유상담연구원장 정태기 목사가 이끄는 '영성수련'에 2박3일 동안 참여했던 200여명의 참석자들이 정 교수의 첫마디에 웃음을 터뜨린다.
"여기 오기 전에도 설거지를 했어요. 설거지를 할 때마다 우리 가정에 은총이 쏟아져요."
중년 주부들이 박장대소를 한다. 정 목사의 말은 농담 같지만 실은 삶의 아픈 고백이기도 하다. 그는 부인과 서로 다른 성격을 받아들이지 못해 고통스럽게 지내다가 5년 뒤 아내와 두 딸을 남겨두고 도망치듯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사람이다. 그는 그 뒤에도 7년 동안이나 남남이나 다름없이 살다 상처를 극복하고 가정을 회복했다.
남편이나 아내를 원수처럼 여기며 성직자나 어른들의 '공자 왈, 맹자 왈'에 진절머리를 내던 중년들이 정 목사의 말에 귀를 여는 것도 '그만은 내 속을 알아줄 것'이라는 동질감 때문이다.
정 교수가 섬마을에서 두집살이를 하던 아버지와 오로지 자식들을 먹여 살리려고 들로만 나갔던 어머니 사이에서 사랑에 목말라 했던 울보의 얘기를 들려준다. 사랑에 굶주려 어머니 몰래 광 속의 목화를 퍼다 엿을 바꿔먹곤 했던 꼬마 도둑, 아버지와 마주한 밥상에서 생선을 집어먹다가 두들겨 맞은 이후 말도 제대로 못했던 말더듬이 소년…….
아내와 친구 등 성격이 다른 이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성격이 형성되었던 '소년 태기'의 얘기였다.
제가 여기에 나온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저와 같은 삶을 살지 말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서른일곱 살까지 정말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신학대학에서 공부도 했고 전도사도 지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람을 너무 무서워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였습니다. 또 다른 별명이 있었는데 '재봉틀'이었습니다. 몇 사람들 앞에만 서면 사람들이 모두 보일만큼 후들후들 떨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서른일곱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제가 살고 싶은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요. 내가 주인이 아니라 나하고는 상관없는, 엉뚱한 어떤 주인이 내 마음 속에서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나무꾼이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나무 밑에 있는 새알을 보았습니다. 그 새알을 먹으려고 가지고 왔다가 자기 집의 닭이 계란을 놓고 부화를 하고 있는데, 그 안에 새알을 집어넣었습니다. 알이 부화되어보니 독수리 알이었습니다. 독수리 한 마리가 병아리와 함께 컷습니다. 7~8개월이 지나니 완연한 독소리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병아리들 속의 독수리는 자기가 독수리인줄 몰랐습니다. 어느 날 병아리들과 모이를 쪼고 있는데 하늘에서 독수리가 창공을 날고 있었습니다. 병아리 속의 독수리는 창공의 독수리들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나도 저렇게 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고는 다시 모이를 먹습니다. 날아갈 생각도 못합니다. 왜? 자신이 병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이곳에 서 있는 이유는 분명히 하나입니다. 여러분들 자신이 독수리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들 중 아마 수 없이 많은 분들이 하늘의 창공을 날고 있는 독수리만 바라보면서 '나도 저렇게 날면 좋겠다'라고 생각만 하면서 한번도 날 시도를 안 해보는, 한 번도 날개를 쳐보지 않은 분들이 많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37살까지 그렇게 살았습니다. 저는 날개를 쳐서 날 시도를 해볼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어둠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산 것은 어린 시절 가정에서 받은 상처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아버지로부터도 엄청난 상처를 받았고, 어머니로부터도 상처를 받았습니다. 저희 집은 꽤 괜찮게 사는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이라고는 조금도 느껴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보다 세 살 더 많은 우리 어머니말고 우리 집엔 아버지보다 16살 적고 예쁜 작은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우리 어머니에게 4남매가 있었고, 작은 어머니에게 5남매가 있었습니다.
어린 저는 집에 아버지가 있으면 캄캄할 때까지 함께 놀 친구도 없는데 밖에서 마을을 빙빙 돌았습니다. 왜냐하면 집엔 무서운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일에 푹 빠져서 자식에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정과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면 그 자식에게는 분명 훗날의 삶을 어둡게 만ㄷ는 상처가 자리를 잡고 그 상처가 주인 노릇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상처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다? 이유 없이 불안합니다. 그리고 이유 없는 짜증과 분노가 끓어오릅니다. 그리고 만만한 사람들에게 그 분노를 풀려고 합니다.
저는 그래서 어린 시절 저희 집에 일하러 오는 아주머니의 아들인 삼식이와 우리 집에서 일하는 어린 소녀 막둥이, 그리고 얼룩소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상처 받아서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입힌 것입니다.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합니다. 결혼한 뒤 제 아내가 설거지를 하다가 소파에 앉아있는 저를 보고 싱긋 웃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웃는 아내를 보면서 '왜 나를 비웃어? 왜 남편을 비웃어?'하면서 화를 냈습니다. 아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당신 비웃은 거 아니야'하는데도 저는 그 모습이 비웃는 걸로 보인 것입니다. 사랑 받지 못하고 버림 받았다는 상처 때문에 누구에게 또 버림 받을까봐 또 무시당할까봐 겁이 난 겁니다.
저는 미국 유학 가서 37살이 되어서야 치유그룹에 들어가 6개월 동안 서럽게 울고 또 울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픔과 상처를 보고, 그들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사랑스럽고 정다운 존재임을 발견했습니다. 눈을 뜨니 세상은 아름다웠습니다.
길고 긴 정 목사의 진솔한 간증에 '소년 태기'만큼이나 마음이 상했던 어린 영혼들의 아픔이 되살아난 듯한 참석자들의 들썩이는 어깨에서 흐느낌이 느껴진다. 무의식 속에 감춰두었던 상처가 수면 위에 떠오른 것이다.
참여자들은 이렇게 엉망이 돼버린 '오늘의 나'가 만들어진 원인인 상처를 뚜렷이 보기 시작했다. 10명씩 구성된 각 조가 '과거'를 탐사했지만 처음엔 누구도 쉽게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러면 이들은 다시 강당에 모여 찬양을 했고, 찬양이 무르익으면 하나 둘씩 일어나 율동에 나섰다. 회갑을 넘겨 머리가 희끗희끗한 정 목사 부부가 앞장서 북을 치고 몸을 흔들면, 주춤주춤하던 이들도 용기를 내 일어서기 시작했다.
잠시 뒤 숨을 고르고 묵상기도를 하고, 또 조별 치유에 나선다.
어린 시절부터 시험 결과가 나오는 날은 늘 1등을 하지 못했다고 방에 갇혀 엄마 아빠에게 얼굴이 터져 피가 흐를 때까지 맞았다는 청년, 10대 때 한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한 충격으로 남자가 두려워 결혼 생활마저 파경을 맞이했던 30대 여성, 평생 남편에게 맞고 살았다는 50대 여성,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못난 놈"이란 핀잔을 들으면서 사회에 진출해서도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못하는 40대 남성…….
4~5년 전 이 영성수련에 참석해 '현재의 나'를 발견한 뒤 크리스천치유상담연구원에서 '새로운 나'를 만들며 살맛나는 세상을 살기 시작한 선배들의 지도로 이 방 저 방에서 어두웠던 과거의 상처들이 쏟아져 나온다.
늘 왕따를 당했던 이들은 리더들과 조원들의 조건 없는 응원 속에서 드디어 평생을 억눌러왔던 바윗돌인 상처에서 벗어나 훨훨 날아오를 채비를 갖추었다. 그리고 좀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찬양을 하고, 또 춤을 추며 날아올랐다. 그런 사이 딱딱하기만 했던 몸이 풀리고 마음마저 덩달아 풀리면서 어느새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다른 치유 프로그램이 4~5일 이상 진행되는 것에 비해 비교적 짧은 기간인데도 참여자들이 이처럼 평생 굳게 닫아온 마음의 빗장을 쉽게 여는 데는 정 목사의 진솔한 고백이 적잖은 구실을 한다.
정 목사는 미국에서 7년이나 치유목회를 공부하면서도 지도교수가 무서워 앞에 서기조차 두려워하다 어느 날 "왜 그렇게 나를 무서워하느냐"는 지도교수의 질책을 듣고, 자신의 과거를 울며 고백했다. 그 뒤 치유그룹에서 치유를 받은 그는 자신을 꽁꽁 묶어두었던 어둠의 실체를 발견하고 이를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수백 명의 군중 앞에서 마음껏 울고 웃고 흔드는 '무대 체질'을 뽐낸다. 그와 더불어 춤을 추는 동안 참여자들의 가슴에도 자신감이 차오른다.
"그래, 나도 더는 이렇게 살지 않겠어."
왜 남편, 아내, 자식에게 못살게 굴었는지, 자신의 '상처'를 직시한 이들의 마음은 벌써 집으로 향했다.
"치유가 곧 구원이다."
정 목사의 말을 뒤로한 채 수양관 밖을 나오니 성탄 트리로 장식된 십자가가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조현 기자 cho@hani.co.kr
[이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한겨레출판 펴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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