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을 키우는 이유는 애정을 주고받는 대상이 필요해서이다. 동물을 소유하는 것과 달리 동물과의 관계 그 자체가 소중하다. 동물과 함께 생활하면서 느끼는 친밀감은 심리적 안정을 주고, 동물은 그렇게 가족의 일부가 되어간다.
반려동물은 개인적 표현의 창구가 되기도 한다. 반려동물을 선택하고 기르는 방법에서 사람의 개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나운 개를 키우는 사람을 보면 사회에 대한 적대감의 표현은 아닐까, 혹은 진기하거나 위험한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그런 동물처럼 독립적이고 특별함을 내재했기 때문은 아닐까 가끔 생각한 적이 있다. 어떻든 개가 그렇게 사람의 특성을 따라가거나,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서) 사람의 사회화 도구로 표현되는 것을 보면, 인간과 더불어 잘 살아가는 방증이 아닐까 생각한다.
얼마 전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유기견을 ‘퍼스트 도그’(대통령과 함께 사는 반려견)로 입양했다. ‘네모’라는 한 살 반 정도 된 래브라도 리트리버와 그리핀 종이 섞인 ‘믹스견’(혼혈견)이다. 반려동물 사랑이 유난한 프랑스에서도 유기견 문제는 존재한다. 바캉스 철이 되면 유기견 문제가 불거지는데, 한 해 휴가철에만 6만마리, 대략 하루에 1000마리의 개가 버려지는 놀라운 통계가 있다. 4가구 중 1가구가 개를 키우고 연간 5조원 이상의 관련 사업 시장이 형성된, 이른바 ‘애완견 종주국’ 프랑스의 놀라운 이면이 아닐 수 없다.
마크롱 대통령에 앞서 문재인 대통령도 유기견 ‘토리’를 입양했다. 도살되기 직전 동물단체에 구조된 검은 개였다. 검은 개에 대한 편견과 차별 속에서 구조 뒤 입양도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뿐이었을까. 한국 역시 ‘반려동물 인구 1000만’이라는 통계를 갖고 있지만, 유기견 입양 등 반려동물 문화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느낌이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작은 토종개와 불도그의 교잡으로 개량된 품종인 프렌치불도그. 프랑스 유기견 문제를 생각하면서 인간들의 이기심으로 교잡해 만들어진 품종들의 신체적 고통도 함께 떠올렸다. 불만이 가득 차 보이기도 하고 무심해 보이기도 하는 프렌치불도그 특유의 표정을 보고 사람들은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하지만, 우리는 이런 뚱한 표정 안에서 이 아이들의 진심을 다시 읽어야 하지 않을까.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