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9일 전남 고흥군 금산면 홍연마을에서 고흥마을대학과 마을 주민들이 꾸민 김단단, 한미리 부부의 전통혼례 모습. 고흥마을대학 제공
지난달 19일 전남 고흥군 금산면 홍연마을이 떠들썩했다. 고산 윤선도가 400년 전 심었다는 고산목 앞에서 마을에 사는 60대 부부 김단단, 한미리씨의 지각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다. 부부는 40년 넘게 함께 살면서도 바쁘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다 아직 식을 올리지 못했다.
60대 결혼식에 90대 어르신들 “오래 잘 살아!”
주름살 진 새신랑과 새색시를 앞에 두고 90대 마을 어른들이 “오래도록 잘 살라”는 당부의 말을 하자 김씨가 “그러겠습니다”라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답했다. 풍물패가 길놀이로 흥을 돋웠고 주민들이 손수 차린 음식은 풍성한 늦가을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번 행사는 고흥군의 지원을 받아 고흥마을대학 사회적협동조합이 기획을 했고 세부 행사계획은 주민들이 직접 짰다. 이수일 고흥마을대학 이사장은 “표면적인 기획 취지는 주민 주도로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를 되살리는 것이지만 원주민과 이주민이 자연스레 어우러져 갈등을 해소하고 문화적 동질감을 만드는 게 진짜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고흥마을대학은 지난해 11월 주민 33명이 ‘농산어촌 일자리를 만들어 지역 후계자를 양성해보자’는 취지로 설립했다. 올해 4월 교육부 인가도 얻었다. 현재 조합원은 46명으로, 농업·축산·어업·수산양식업 종사자들이다. 여기에 공예, 조각, 요리연구 등 문화예술인, 농업기술센터와 목재문화체험장, 농협, 학교, 고흥문화원 등 지역기관 운영자와 교사, 교수, 상담사, 간호사, 택견전수자, 문화해설사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힘을 보탰다. 강경우 고흥마을대학 이사는 “한때 20만명을 웃돌던 고흥 인구가 지금은 6만명 수준으로 줄었다. 청년들이 지역에 내려오면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자는 생각에 지역민들이 뭉쳤다”고 설명했다.
고흥마을대학의 모태는 이 이사장이 2015년부터 운영해온 고흥온마을학교다. 고흥온마을학교는 고흥지역 초·중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공교육 체계에서 다루지 않는 ‘고흥의 살아 있는 인문지리’를 교육하려고 시작했다. 전남도교육청이 지원에 나선 뒤 첫해 3개였던 참여 학교는 7년이 지난 지금은 250개로 늘었다. 하지만 진학과 취업을 중요시하는 고등학교는 참여하지 않았다. 주민들이 떠올린 대안은 마을대학이었다. 낯선 고장에 귀농·귀촌해 정착에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마을 역사도 알리는 데는 마을대학이 최적일 거란 판단에서였다.
조합원들은 자치단체가 주관해온 지금까지의 귀농교육에는 한계가 뚜렷하다고 봤다. 지역을 잘 알지 못하는 강사를 초청해 이론 위주 교육을 하고, 영세한 귀농인들에겐 ‘그림의 떡’과 같은 대규모 농가를 참조해야 할 선진 사례로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합원들은 그 대안이 ‘노동과 교육을 병행한 체험교육’에 있다고 봤다.
이수일 이사장은 “고흥은 농지가 넓을 뿐 아니라 팔영산이나 득량만 등 산촌·어촌의 요소가 어우러져 귀촌인들이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는 곳”이라며 “준비가 되지 않은 청년들은 귀농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데 고흥마을대학은 1~2년씩 곁에 두고 안정적인 수입원까지 제공하며 일을 가르친다. 그러니 하다가 ‘이게 아닌가벼’ 하면 언제든 업종을 바꿔 재도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마을대학은 조합원들이 운영하는 농장이나 사업장에서 청년 귀농인들에게 15만원 정도의 일당을 주면서 실습 위주 교육을 진행하고 있었다. 생계를 꾸려나갈 만큼의 수익을 보장해주면서 마을 주민들과 어울리며 지역공동체의 일원으로 자리잡게 하려는 것이다. 살 집이 없는 귀농 · 귀촌인에겐 빈집을 찾아 고쳐 살게 한다.
6월4일 전남 고흥군 도양읍 신흥마을에서 고흥마을대학 조합원들이 라벤더축제를 열고 있다. 고흥마을대학 제공
마을대학의 수업 프로그램은 다양하다. 고흥이 어떤 곳인지를 먼저 파악할 수 있게 고흥의 향토사와 해양 역사, 수산자원을 가르친다. 강사는 이상명 전 연세대 화공생명공학부 교수와 송호철 향토사학자다. 윤금일, 김홍대 조합원은 빈집 개보수, 텃밭 가꾸기 등 농촌 생활에 필요한 실무 기술을 전수한다. 조경희 생태공예가는 해초 등을 이용한 압화 교육을 전담하고, 류임석 기획이사는 마을별 특용작물을 찾아내 지역의 농업 경쟁력을 높이는 데 주력한다.
마을대학이 구상하는 자체 수익사업도 있다. 고흥 바다에 연간 12만톤이 버려지는 해초 부산물을 거둬들여 사료와 퇴비로 가공하는 일이다. 따뜻한 기후의 장점을 살려 라벤더, 허브 등 향기 산업 단지를 조성하는 사업도 마을대학의 핵심 아이템이다. 이들이 준비하는 사업 중에는 귀농인들을 위한 공동주택 프로젝트도 포함돼 있다. 귀농인들의 다양한 기호와 관심을 담아내기 위해 더 다양한 분야의 종사자들을 조합원으로 끌어들이려고 한다.
8월6일 고흥마을대학 사회적협동조합 조합원들이 해양역사, 수산자원 교육의 하나로 전남 고흥군 쑥섬 일대를 탐방하고 있다.고흥마을대학 제공
광주에 살다가 2개월 전 마을대학에 참여한 김비오(41)씨는 임업 분야에서 일하려고 광주농업기술센터에서 교육을 받다가 고흥마을대학을 소개받고 아무런 연고도 없던 이곳에 내려온 경우다. 그는 “지자체가 주관하는 교육은 귀농의 좋은 면만 보여주고 현장교육도 시간 때우기 식으로 진행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하지만 이곳에선 관심 있는 분야의 실무 지식을 몸으로 배우며 귀농 생활을 가감 없이 체험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배우고 있는 것은 라벤더나 허브, 아로마 재배와 오일 가공법이다. 김씨는 “농업의 달인이나 다름없는 조합원들과 함께 일하며 일을 배우니 몸과 머리가 자연스럽게 지식을 습득한다. 게다가 수입까지 생기니 생활하는 데도 불편이 없다”고 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