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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독립운동사에서 묻혀버린 몽양 되살려야”

등록 2007-12-14 21:55

‘여운형 평전’ 펴낸 강덕상 일본 시가현립대학 명예교수
‘여운형 평전’ 펴낸 강덕상 일본 시가현립대학 명예교수
인터뷰 / ‘여운형 평전’ 펴낸 강덕상 일본 시가현립대학 명예교수

분단민족 설움 절감한 재일동포 학자
“몽양 살았다면 전쟁·분단 없었을 것
잘못된 역사 바로잡고 통일 보탬 되길”

근대 중국의 시작을 알린 5·4운동을 촉발시킨 불씨가 조선의 3·1운동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지만, 그 의미는 평가절하돼 있다. 3·1운동 발발 직후인 1919년 3월호 <매주평론>에 실린 중국공산당 창시자 천뚜슈(진독수)의 ‘조선독립운동의 감상’의 일절은 다음과 같다. “위대하고 성실하며 비장하고 정확 명료한 민의를 바탕으로 … 세계혁명사에 신기원을 열었다. 조선민족에게 이러한 영광이 나타나 … 움츠르던 우리 중국민족을 더욱 부끄럽게 했다. … 보라 조선인의 활동을 … 조선인에 비해 우리는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다.”

전 3권 중 먼저 1권이 나온 <여운형 평전>(김광열 옮김·역사비평사 펴냄)의 지은이 강덕상 일본 시가현립대학 명예교수는 13일 전화인터뷰에서 “3·1운동과 5·4운동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하면서 쑨원과 조선인청년단이 연결돼 있었으며 이를 통한 조-중 연대운동에 일본이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3·1운동 직후에 결성된 상하이 임시정부 활동이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 등 당시 동아시아 변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고 그 때문에 “일제정부는 임시정부를 일대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며 그 중심에 몽양 여운형이 있었다고 했다. 강 교수는 자신이 접한, “일제가 식민지배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수집한 방대한 정보”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분야는 민족운동 관계자료였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독립운동가 가운데 가장 빈도가 높고 또 지속적으로 거론된 인물이 바로 여운형이었다고 했다.

1919~20년 제42회 일본 제국의회는 당시 하라 다카시 내각이 여운형을 도쿄로 초청해 회유하려 했다가 실패한 문제를 놓고 여야간에 일대 논전이 벌어졌고 결국 하라 내각은 이 문제로 무너진다. 강 교수가 보기에 몽양은 “기라성 같은 독립운동가 군상들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일등성”이었다. 몽양은 “쑨원, 레닌, 호치민, 왕징웨이 등 각국 지도자들과 교류했고, 하라 다카시, 고노에 후미마로, 우카기 가즈시게, 오가와 슈메이 같은 일제 지도자들과도 얘기할 수 있었던 유일한 독립운동가였으며 그러고도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암흑기에 희망을 준 사람”이었다. 해방 뒤 직접선거가 치러졌다면 “그가 틀림없이 대통령에 뽑혔을 것이고, 그랬다면 우리 힘으로 분단장벽을 없애 전쟁도 없었을 것이며 친일파문제도 자연스레 해소됐을 것”이다.



〈여운형 평전〉
〈여운형 평전〉
하지만 몽양은 남·북한과 일본 모두에서 거의 잊혀졌다. 지금가지 나온 몽양 연구서들은 이만규의 <여운형 전집>(1997)과 정병준의 <몽양 여운형 평전>(1995) 정도를 빼고는 볼 만한 게 없고, 정병준의 것은 그나마 주로 해방 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강 교수는 “독립운동사 분야에서 여운형을 살펴본 선행연구는 거의 없다”며 <여운형 평전>이 바로 그 시기 연구에 중점을 둔 의의를 강조했다. 옮긴이 김광열 광운대 교수는 <여운형 평전>이 “한 독립운동가의 전기라기보다는 여운형을 통해 본 시대사이며, 개별 논문으로 구성된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서”라고 말했다.

1947년 몽양은 이승만 일파에 의해(강 교수는 “당연히 그렇게 본다”고 했다) 암살당했고 한때 그의 동반자였던 장덕수도 암살당했다. 저명한 재일동포 사학자 김달수는 몽양의 죽음을 두고 “우리 조선에 이 이상의 손실이 있을까”라며 탄식했다. 1986년에야 처음 고국을 방문한 강 교수는 서울 수유리의 몽양 묘소와 고향 양평의 생가, 계동의 집을 찾아봤다고 한다. 무너지고 노숙자들 삶터로 변하고 음식점이 된 퇴락한 그 장소들에 “해방 뒤 한국의 분단사관이 집약돼 있다”는 걸 그는 그때 체감했다. 민족 암흑기에 가장 영향력 있고 비중이 컸던 인물, 관련 자료도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인물이 홀대받고 잊혀진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책이 “분단에 의한 허구의 역사인식을 바로잡고 통일로 가는 데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조사하면 할수록 싫어지는 이승만”과 김일성 신화를 깨는 데도 자신의 책이 일조할 것이라고 했다.

강 교수는 몽양 암살 뒤 뒤틀어진 우리 민족사 최대의 피해자는 바로 자신과 같은 해외동포들이었다며 조국의 분단이 재일동포에 대한 일본의 차별을 얼마나 더 심화시켰는지 모른다고 했다. “나는 최근에 0.5와 0.5를 곱하면 0.25가 된다는 말을 하곤 한다. 분단 때문에 주위에서 보면 우리는 0.25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재일조선인인 내가 여태까지 살면서 좋은 일이 별로 없었던 원인은 여기에 있다고 본다. 그 때문에 더더욱 분단은 민족의 원수이며, 통일만이 우리의 소원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차별이 심하냐고 묻자 “당연한 얘기”라며 “(일본인) 납치문제로 일본에서 배척당하는 데는 남·북한 구별이 없다”고 했다.

바로 그 차별 때문에 강 교수는 한국 근대사 및 한-일관계사 분야에서 커다란 연구업적을 쌓았는데도 1980년대 후반 56살이 돼서야 히토쓰바시대학 교수가 됐다. 1990년대 후반 강상중 교수가 재일동포로서는 처음으로 도쿄대 정교수가 되지만 일본 국립대학에서 외국인으로 처음으로 정교수가 된 사람은 강덕상 교수다. 두 살 때 어머니 손에 이끌려 일본에 갔던 강 교수는 1996년 시가현립대로 옮겼고 2002년 현역 은퇴 뒤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여운형 평전 출간을 “만년의 숙제”로 삼아왔다. 모두 3권으로 기획된 평전의 제1권은 2002년에 일본에서 먼저 나왔다. 2권은 2005년에 나왔고 마지막 3권은 내년 3월에 출간될 예정인데 이미 집필은 완료했다. “다음 숙제로 <재일동포의 눈으로 본 한국전쟁>(가제)을 준비중인데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사진 역사비평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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