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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그리움 속에도 그리운 박찬의 유고시집

등록 2008-01-18 19:48

최재봉의 문학풍경
최재봉의 문학풍경
최재봉의 문학풍경/

한국문학에는 유구한 유고시집의 전통이 있다. 그중에는 ‘영원한 청년’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 그리고 진이정의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처럼 첫 시집이 곧 유고시집이 된 안타까운 사례들도 없지 않았다. 윤동주의 시집에는 선배 시인 정지용이, 기형도의 시집에는 평론가 김현이, 진이정의 시집에는 동료 시인 유하가 각각 서문과 해설과 발문을 덧붙여 이른 죽음을 애도했다.

첫 시집이 아니라고 해서 유고시집을 대하는 안타까움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고정희의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김남주의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그리고 박영근의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를 읽을 때 산 자들은 새삼스러운 회한과 그리움에 휘둘리고는 한다.

여기 또 한 권의 유고시집이, 저승에서 온 편지처럼, 막 도착했다. 지금으로부터 꼭 1년 전인 2007년 1월19일 타계한 박찬의 〈외로운 식량〉(문학동네)이다. 1948년생이니 살아 있다면 올해가 갑년이다. ‘백세 건강법’이 유행하는 시대에 갑년을 못 채운 죽음이란 일종의 요절에 해당할 터. 시집 곳곳에서 마주치는 죽음에의 예감이 한층 시리게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백모란 지던 시절/ 그 시절 시들 듯 시들어갔네/ 꽃 같던 모습/ 뚝뚝 지는 꽃처럼/ 빗방울 후드득 떨어지고/ 하늘은 다시 맑았네/ 뒷산 불던 바람 자연하고/ 흰 구름 둥둥 여여하였네// 그 시절 시들 듯 그도 시들어갔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네/ 꽃잎만 한 잎/ 뚝! 떨어졌을 뿐”(〈그 시절〉 전문)

“지루하고 막막한 날이 끝나간다/ 그 끝에서 홀로 붉게 타는 칸나여, 안녕!/ 다시는 못 볼 푸른 하늘이여, 너도 안녕!”(〈소리를 찾아서-서래봉 가는 길〉 전문)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을 쓰던 몇 년 동안 그가 줄곧 죽음에 들려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을 것이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생활인으로서, 그리고 시인으로서 그는 사랑하고 모색하고 노래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사랑이 없다면 땅도 비도 눈도 바람도 햇빛도 그리고 마음도 없는 황량한 죽음뿐일 것”(〈오래된 숲 2〉)이라 노래했던 그. 임종에 즈음해 그가 부인과 두 딸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사랑해”였단다. 그 입 모양대로 숨을 거두었다고.


시집 〈외로운 식량〉의 출간을 기념하여 “조촐하게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술 한잔 하는”(〈몸살〉) 자리가 18일 저녁 서울 대학로에서 있었다. 민영·현기영·김형수·정우영·김해자·나희덕씨 등 선후배 문인과 유족이 모여 고인에 관한 회고담도 나누고 시집 속 시인의 시를 대신 낭송하기도 했다. 생전에 절친했던 문인수 시인은 추모시 〈이명처럼 그가 오겠네〉를 낭송하고 소지(燒紙)의 예를 갖추었다. 그러니까 이 자리는 고인의 첫 제사에 해당했다. 다음은 후배 시인 박후기씨가 읽은 그의 시 〈산골을 하며〉의 마지막 대목이다. 생전의 그가 쓴 글을, 저승의 그에게 이제 되돌려준다.

“매양 그러하지만 또 눈물납니다/ 이제 이 세상이 모두 당신 집이지만 당신은 어디에도 안 계십니다/ 어디에도 남아 있지 마십시오/ 그리움 속에도 그리워하는 마음속에도 부디 계시지 마십시오”(〈산골을 하며-어머님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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