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봉의 문학풍경
최재봉의 문학풍경 /
“지금까지 ‘소설’에 집중되어온 문학비평은 소설의 범위를 넘어 ‘서사’로 확대되어야 한다.”
문학평론가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영문학)가 문학비평의 범주 확장을 주장하고 나섰다. 영상과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다양한 매체들이 서사 공급권을 놓고 다툼을 벌이는 상황에서 동종교배적이고 근친상간적인 문학의 자족성은 문학 자신의 위축은 물론 사회 전체의 위기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다. 도 교수는 가령 그림과 수준 높은 언어표현이 결합된 ‘그림소설’을 조만간 비평의 작업 대상에 포함시켜야 할 새로운 형태의 서사형식이라고 보았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인문학자인 도 교수의 이런 주장은 비평 전문지 <오늘의 문예비평> 겨울호에 실린 논문 ‘비평의 위기와 활력’에서 제기되었다. 이 잡지가 일본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 론을 겨냥해 마련한 특집 ‘비평의 종언을 넘어서는 비평’에 실린 도 교수의 글은 가라타니의 주장에 담긴 의미와 한계를 두루 짚으면서 한국 문학과 비평이 그로부터 얻을 것이 무엇인지를 궁구한다.
도 교수는 우선 문학 종언론과 근대문학 종언론을 구분하는 것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문학 자체의 종언 주장은 성립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특정의 장르나 표현형식이 새롭게 출현하거나 몰락할 수는 있어도 글을 쓰고 이야기를 만들어 퍼뜨리는 행위로서의 ‘문학현상’ 자체는 인간의 보편적 본성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문학이 주로 인쇄매체에 의존해 있는 반면, 현대의 다양한 영상매체 및 디지털 유통 기술의 발전은 인쇄매체의 지배적 지위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에 문학이 위기인 것만큼은 틀림이 없다.
근대문학의 종언 주장에도 허점은 많다. 도 교수가 보기에 종언론 계열 비평가들이 주장하는 근대문학의 종언이란 ‘사실주의 소설의 종언’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이때의 사실주의는 현실의 충실한 반영과 묘사라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 발전 방향을 전제한 인식과 서술의 방법론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사실주의에 가까운 개념이다. 그러나 “비평은 도그마가 아니다.” 비평이 총체성을 주장할 때에도 그 총체성은 만들었다가 허물고 허물었다가 다시 세우곤 하는, 유연성을 갖춘 총체성이어야 한다.
근대문학의 종언론은 특히 소설의 운명에 주목한다. <돈키호테>가 출현한 17세기 초 이후 400년 동안 근대문학의 대표선수로 활약해 온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의 수명이 다한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종언론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도 교수는 그에 대한 즉답 대신, 문학비평의 대상이 되는 장르와 매체의 확장에서 활로를 찾자고 제안한다. 한편으로는 영화, 만화, 그림소설 같은 디지털 시대의 혼합매체적 서사형식에 주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 사회의 지배적 서사(이야기)에 맞서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시장, 탐욕, 효율, 선망의 신이며 이것들은 뭉뚱그려서 ‘행복의 서사’로 행세하고 있지만, 도 교수가 보기에 그 행복의 서사 뒤에 감추어져 있는 것은 ‘죽음의 서사’이다. 비평은 바로 그 행복 뒤에 도사린 죽음의 정체를 까발려야 한다. 그것이 독자 대중의 삶과 관심사에서 멀어짐으로써 위기를 자초한 비평이 다시금 활력을 찾을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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