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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지도는 한 시대의 맥락과 이해관계 산물”

등록 2008-01-25 22:16

 ‘지도 만드는 사람’ 펴낸 설혜심 교수
‘지도 만드는 사람’ 펴낸 설혜심 교수
인터뷰 / ‘지도 만드는 사람’ 펴낸 설혜심 교수

보고 읽고 듣는 지도라는 개념 통해
영구국민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역사·문화에 대한 새 관점으로 통찰
“오늘날엔 드라마·영화가 지도 구실”

1533년, 영국 왕실의 도서 담당관이었던 존 릴런드는 헨리 8세의 명을 받고 답사에 나선다. 겉으로 드러난 임무는 전국의 수도원 도서관에서 귀중한 고대 문헌을 수집해 오는 일이었다. 수도원을 해체해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고 성직자들을 쫓아내는 종교개혁이 한창이던 때였다.

그는 여러 차례 뚜벅뚜벅 전국을 여행하면서 사물과 유적, 만난 사람과 들은 이야기를 기록했다. 너무나 상세히 기록한 탓에 본연의 임무가 스파이였다는 추측도 있지만, 이 기록이 담긴 〈답사기〉로 그는 ‘영국 지지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답사기〉에서는 사람 냄새가 났다. 〈답사기〉가 묘사한 영국에는 전투에서 피신해 평민들 집에 숨어든 공작 앞에서 무심코 문을 닫는 바람에 공작을 죽인 평민 여성 이야기, 빼어난 외모 덕분에 결혼으로 신분상승한 사람의 이야기 등 오욕칠정을 지닌 사람들이 살아 꿈틀대고 있었다. 릴런드는 중세의 전통적인 연대기적 역사와 정치사 위주의 서사에서 벗어나 영국 전체를 하나로 아우른 공간 위에 자연과 사람의 과거와 현재, 다시 말해 역사를 함께 꿰어냈다.

사람들은 언제부터 자신이 발 딛고 사는 공간을 ‘공통의 역사적 공간’인 ‘국토’로 인식하기 시작했을까? 〈지도 만드는 사람〉(도서출판 길·2만5000원)은 이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책이다. 책을 쓴 설혜심 교수(연세대학교 사학과·사진)는 〈온천 문화사〉(한길사) 〈서양의 관상학 그 긴 그림자〉(한길사) 등의 저작에서 역사의 매혹적인 열쇳말을 뽑아 이야기를 풀어낸 바 있다.


16·17세기 영국에서 성행한 온천에서 여가와 쾌락을 즐긴 사람들, 관상학을 과학이라고 믿으며 이방인·여성·동물을 타자화한 사람들 이야기가 “고유의 색깔과 시각으로 독특하고도 사람 냄새 나는 역사 이야기”를 하고팠던 설 교수의 레이더망에 걸려든 것이다. 그는 “사람 냄새 나는” 존 릴런드의 〈답사기〉에도 매혹됐다고 한다. 〈답사기〉를 통독하다가 ‘지도’와 ‘국민성’이라는 열쇳말을 뽑아내 영토 개념의 형성 과정을 찾아 나선다.

“국토 인식의 시작점이 영국에서 유럽 최초로 국민국가가 탄생했던 시점과 일치합니다. 16세기 초의 영국은 로마 교황청과의 단절, 국교회 창립, 수도원 해산과 같은 전례 없는 변화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이었던 사람들이 귀속감을 느낄 수 있는 새로운 대상이 필요했고, 국왕과 정치 엘리트 집단은 사람들을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로 국민이라는 개념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합니다.”


〈지도 만드는 사람〉
〈지도 만드는 사람〉
이 과정에서 릴런드의 작업을 바탕으로 발달한 역사 지지서는 국토라는 공간에 사람을 연결해 국민으로 거듭나게 만드는 작업을 맡았다. 지도도 마찬가지였다. 절대주의 시대 유럽 여러 나라들이 지도를 통해 국민에게 국토를 인식시키는 작업에 나섰지만, 가장 먼저 국가 전도를 만들어 보급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1579년에 제작된 크리스토퍼 색스턴의 〈영국 전도〉는 영국 역사상 국민 정체성 창출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지도로 꼽힌다. 인쇄되어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간 이 지도는 “영국 사람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물리적 왕국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하고 관념화한 소유물을 처음으로 갖게” 했다.

설 교수는 ‘읽는 지도’인 역사 지지서와 국토를 시각적으로 재현한 ‘보는 지도’가 단순히 실제 공간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었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국토에 대한 담론을 형성하는 매개체”였다. 따라서 ‘지도 만드는 사람’은 “국경 안의 사람들을 동질적인 문화권으로 편입시키려는 근대국가의 기획에 앞장선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지도로 ‘만들어진’ 영국의 정체성은 엄청난 지속력과 파급력을 지녔다. 영국을 방문한 여행객들도 영국에서 만든 역사 지지서를 토대로 영국의 인상을 결정했다.

외국인들이 남긴 여행기를 분석한 설 교수는 이들의 내용과 말투가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아가 여행기는 영국이 만든 역사 지지서의 내용과 비슷했고, 심지어 그대로 인용한 부분도 있었다.

“자국에 대해 먼저 많은 정보를 축적하고 기술한 나라일수록 자국을 바라보는 외국인의 시각을 만들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놓여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영국인과 외국인 모두에게 지도는 영국인의 정체성을 들려주고 강화한 일종의 ‘듣는 지도’가 된 셈이지요.”

영국의 정체성을 만든 지도의 탄생 과정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역사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지도는 한 시대의 사회적 맥락과 이해관계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유럽의 17세기 지도를 보면 우리나라를 무인도에 열대지방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만큼 서양이 우리나라에 무지했다는 걸 증명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독도를 우리땅으로 표기한 지도가 발견되면 언론에서 진실이 밝혀졌다며 난리를 치고, 미국의 정보기관에서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면 쫓아가 사이버 테러를 합니다. 그런 현상의 배후에는 지도가 객관적인 증거라는 믿음이 있는 것인데, 그런 고지도가 엄정한 사료로서의 가치를 갖는다고 믿기보다는 일종의 가공물이며 창조물이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대적 배경을 옮겨 응용력을 길러보자. 근대 초기가 아닌 현대에 ‘지도 만드는 사람’은 누구일까?

“오늘날 ‘지도 만드는 사람’은 미디어에 종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외국에 가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보고는 ‘서울이 그렇게 좋은 곳이냐’고 물어옵니다. 진짜 이미지가 아니더라도 지속력과 파급력이 있다는 점에서 이제는 드라마와 영화의 시각적 이미지가 예전의 지도 구실을 한다고 봅니다.”

글 김일주 기자 pearl@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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