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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묵향 사랑 꽃피운 사대부의 육아일기

등록 2008-04-18 19:33수정 2008-04-19 16:38

〈선비의 육아일기를 읽다〉
〈선비의 육아일기를 읽다〉
〈선비의 육아일기를 읽다〉
김찬웅 지음/글항아리·1만5000원

비운의 선비 이문건 유배지서 손자 키운 ‘양아록’
“병든 아비 죽자 우는 아이…눈에 핏방울 맺힌다”
17년 내리사랑 책 건네 손자 앞길 하늘에서 인도

조선 최초의 육아일기. 게다가 남자가, 더구나 할아버지가 썼다. 그렇다고 일기의 내용이 특별하진 않다.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우리 부모들의 손자 양육기를 연상하면 된다. 관심은 왜 그 고통스런 체험을 굳이 기록했느냐에 있다.

일기장의 주인은 이문건(1494~1567)이라는 사대부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귀양살이 중 <다정가>를 읊조린 고려 후기 명재상 이조년이 그의 8대조다. 이조년 앞에 이백년, 이천년, 이만년, 이억년 5형제 모두 문과에 급제한 이름대로 ‘영겁’의 집안이다.

이문건과 두 형님도 과거에 급제했지만 그 인생은 지독히도 고단했다. 이문건의 시대적 삶은 사화와 당쟁의 희생양 그 자체였다. 중종 14년 기묘사화의 후폭풍으로 20대 나이에 유배됐고 명종 때 다시 을사사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50대에 귀양을 갔다. 23년간의 유배생활 도중에 생을 마감했다. 가족적 삶은 더 비극적이었다. 8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두 형도 한꺼번에 죽었다. 여섯 자식 중 성인까지 살아남은 것은 아들 온 하나뿐이었다. 그마저 아들은 어릴 때 열병을 앓아 몸과 정신이 성치 않았다.



당시 돌잔치는 살아남은 아이에 대한 축하 의례였다. 돌잡이를 하는 손자가 첫번째로 붓과 벼루를 집자 이문건은 내심 흐뭇했다.
당시 돌잔치는 살아남은 아이에 대한 축하 의례였다. 돌잡이를 하는 손자가 첫번째로 붓과 벼루를 집자 이문건은 내심 흐뭇했다.
아들이 죽기 전에 손자를 낳았으니 그때 58살이었던 그의 관심은 온통 손자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다. 손자를 당당한 사대부가 되도록 가르치고 가문의 맥을 잇도록 하는 게 유배기간 중 그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유배지 성주에서 탯줄을 끊으면서 시작된 양육기는 이문건이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이어진 유배일기이기도 하다.

지은이 김찬웅씨는 마흔에 첫아이를 얻어 어떻게 길러야 할지 고민하다가 이 일기책을 만났다고 한다. 한시로 쓰인 일기 <양아록>(養兒錄)을 소설 형식으로 풀어내면서 원문과 한자풀이를 부록으로 담았다. 고사에 얽힌 인물과 역사상식도 재미있다.

할아비는 손자 숙길의 연약한 몸을 물어뜯는 벼룩과 이를 증오했다. “젖먹이가 속으로는 괴로워도 어찌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내게로 오라.” 살아남았음을 기뻐해 치르는 돌잔치에서 할아비는 “첫 번째로 붓과 먹을 집었으니 훗날 진실로 문장을 업으로 삼을 듯하다”며 흐뭇해했다. 육아일기는 병치레 일기에 가까웠다. 세 돌에 찾아온 학질과 같은 질병의 연례행사를 치르면서 할아비는 늙어갔다. “울부짖으며 애원하는 소리가 그칠 줄 몰라 차마 보고 들을 수 없다.” 괴로움은 자책으로 이어진다. “나의 운명에 액운이 깃들어 자손들이 모두 병을 앓게 되니….”

가끔 감동도 있다. “젖을 떼게 하고 내 잠자리로 불렀더니 품에 안겨 가슴을 만지고 달라붙는다.” 할아비는 손자에게 “아름다운 품성 온전히 지켜 어른이 되어서도 저버리지 마라”고 당부한다.


이문건은 책과 담을 쌓은 손자를 직접 가르쳤다. 때론 손자가 가르침에 감히 토를 달고 논쟁을 벌여 화가 나  매질을 하기도 했다.
이문건은 책과 담을 쌓은 손자를 직접 가르쳤다. 때론 손자가 가르침에 감히 토를 달고 논쟁을 벌여 화가 나 매질을 하기도 했다.
아들이 나이 마흔에 숨을 거둘 때 손자 나이는 7살. “병든 아비 죽자 그 옆에서 곡을 한다. 두 눈에 핏방울이 맺힌다. …훗날까지 아버지 얼굴 자세히 기억하려 애써야 할 것이다.” 하지만 숙길은 아비를 잃은 다음부터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초조했을까? 할아버지는 자신의 강박증을 손자에게 투영한다. 책은 안 읽고 종일 그네만 타자 “칼을 휘둘러 그네를 끊어버렸다.” 고서를 해석해주는데 손자가 두 차례나 반론을 펼치자 “화를 내고 책을 밀쳐버렸다. 말채찍 손잡이로 종아리를 30대 때렸다.” 여기까진 부모 눈높이에서 공부만 강요하는 요즘 가정의 모습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할아비의 난폭함을 진심으로 경계한다”고 반성한 뒤 훌륭한 문장가가 돼주길 원한 할아비의 욕심을 접고 손자의 건강과 품성에만 신경을 쏟는다.

할아버지의 회초리가 전혀 아프지 않게 느껴질 무렵 무거운 이별의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지은이는 손자와의 마지막 장면을 이렇게 상상했다. 17살 청년이 된 손자에게 책자를 내밀었다. “이 책자를 ‘나’라고 생각하고 간직할 수 있겠느냐?” <양아록>을 한장 한장 넘겨보던 손자는 울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실제로 이문건은 일기 머리말에 “손자가 커서 이 글을 보게 된다면 할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썼다. 아들 온과 자신이 죽은 뒤에도 손자가 어긋나지 않길 바라는 뜻에서 일기를 쓴 것이다.

할아버지가 떠난 뒤 손자는 어떻게 됐을까? 과거엔 못 붙었지만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4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지만 대를 이을 아들 둘을 낳아 할아버지를 편히 잠들게 했다.

한광덕 기자 k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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