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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절제된 그림 속 여성 예인의 ‘붉은 피냄새’

등록 2008-05-16 19:56

〈붉은 비단보〉
〈붉은 비단보〉
예술-현실 균형잡은 ‘신사임당’ 주인공
불덩이 억누른 냉철한 ‘현모양처’ 그려
극단에 치달은 허난설헌·황진이 ‘대조’
〈붉은 비단보〉
권지예 지음/이룸·1만1700원

권지예(48)씨의 두 번째 장편소설 <붉은 비단보>는 신사임당의 삶에서 단서를 잡아 “조선시대에는 ‘저주받은 영혼’과도 같았던 여성 예술가”들 삶의 이면을 그린다. 작가는 “신사임당은 바깥으로 드러난 삶과 그 이면의 조도 차이가 엄청난 인물일 거라 생각했다”며 “몸냄새, 피냄새, 눈물 냄새 나는 삶을 산 인간이 절제미 있는 그림을 그렸다면, 영혼의 고통이 질적으로 가치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착안했다”고 말했다.

소설은 주인공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어머니의 그림 재주를 물려받은 첫째 딸 묘진과 글 재주를 타고난 막내 아들 빈이 어머니의 죽음 뒤 유품인 붉은 비단보를 발견한다. 자유롭게 어울려 쌍그네를 타는 남녀, 붉디 붉은 모란이 그려진 치마, 한몸이 되어 얽혀 있는 연리지 나무……. 소설의 화자는 혼령이 된 신사임당 자신으로 바뀌어 “마흔여덟 해 동안 내 생의 그림자”와도 같았던 붉은 비단보에 얽힌 비밀스런 삶의 편린들을 펼쳐보인다.

딸만 다섯인 집에서 막내 동생 ‘말희(末姬)’가 태어나자 자신의 이름을 ‘항아(恒我)’로 바꿔 부른다고 선언했던 당찬 어린 시절을 거쳐 끝내는 마음 속의 ‘한없는 샘’으로 남은 사랑을 가슴에 묻고 주인공은 마음을 비우고 삶에 복무하기로 한다. 그는 남편과 시어머니를 거스르지 않는 아내로, 일곱 자식들의 어진 어머니로 번듯한 삶을 꾸린다. 주인공의 삶은 각각 글재주와 춤솜씨를 타고난 두 여성 사이에서 극단을 피해 스스로 파멸하지 않고 균형추를 맞춘 삶으로 그려진다.


소설가 권지예
소설가 권지예
도가 사상에 심취해 피안을 바라보며 선녀계의 이상향을 꿈꾸다 현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로 삶을 마감한 가연, 첩실의 자식이라는 현실의 족쇄 때문에 기생이 된 초롱 사이에서 주인공은 평범한 지어미의 삶을 이어간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지녔던 창작의 허기만은 잃지 않는다. 주인공이 죽은 뒤 묘진을 찾아간 초롱은 “내가 뽐내던 한낱 재주와 미색도 지금의 이 값진 비단옷도 다 늙은 자네 어머니의 거친 손과 무명옷을 이기지 못했”다며 주인공의 삶을 옹호한다.

그렇게 마흔여덟 해를 살아낸 뒤 죽음을 앞둔 주인공은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생에 치를 떨면서도 유능제강이란 단어를 새기면서 살아왔다. 부드러움이 결국 강함을 이긴다. 나는 삶을 껴안기 위해 구부러졌다.…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 상처 주지 않기 위해 내 몸을 조이는 엄나무 가시 같은 상처를 참으며 살아온 세월이었다.…그림은, 글씨는 내 상처를 먹고 자랐다. 상처가 아플수록 나는 그림을 욕망했다. 그것들은 나의 정인(情人)이었다. 오히려 정인이 있어서 내 앞의 삶을 더욱 반듯하게 살아냈다. 모순이었다.…모순이 아니라면 삶이 아니지. 모순을 껴안지 않으면 삶이 아니지. 후회는 없다.” (352쪽)

작가는 “주위에서는 스캔들도 일으키는 게 작가답지 않느냐고 하지만 저 스스로도 신사임당처럼 살고 있다”고 했다. “폭풍 같은 삶을 살다가 한 줌의 작품만을 남기고 전설이 된 전형적인 예술가의 삶이 아니라, 세상의 제약까지 끌어안으며 삶에 함몰되지 않고 냉철했던 여성 예술가의 삶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예술가는 어떡하든 작품으로 살아남아야 합니다. 현대 사회가 집을 박차고 나오기 훨씬 쉬운 시대이긴 하지만, 자기 삶을 지키고 시간을 견디며 직업적으로 철저히 균형감 있게 예술과 일상을 공존시키는 여성 예술가의 삶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글 김일주 기자 pearl@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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