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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하산한 차라투스트라’ 해탈을 말하다

등록 2008-05-23 21:41

〈잡설품〉
〈잡설품〉
김윤식 교수의 부름에 응답
‘죽음의 한 연구’ 연작 완결
신성 찾는 ‘인간 재림’ 강조
〈잡설품〉
박상륭 지음/문학과지성사·1만4000원

“이제 어쩌면 좋단 말인가. 초인이여, 차라투스트라여, 카인이여, 우리의 패관 박상륭이여. 중원의 어법에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는 고토의 징조가 아직도 그대 초인의 눈엔 보이지 않는가.”

문학평론가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가 지난해 10월 <한겨레>에 쓴 칼럼 ‘‘차라투스트라’ 박상륭을 기다리며’의 한 부분이다. <소설법>(2005) 이후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박상륭(사진)씨의 ‘하산’을 호소한 이 글을 박씨 자신은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로 시작하는 <구지가>로 들었다고 했다. 새 장편 <잡설품>을 내고 지난 20일 기자들과 만난 그는 “<잡설품>은 김윤식 선생의 그 부름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했다.

작가는 또한 이 작품이 <죽음의 한 연구>(1975)에서 시작해 <칠조어론> 전 3부(1990~94)를 거쳐 도달한 연작의 제5부이자 완결편이라고 소개했다. “<죽음의 한 연구>가 죽음과 삶의 관계를 천착했다면, <칠조어론>은 고행을 다루었고, <잡설품>은 해탈에 관한 작품”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잡설품>은 <죽음의 한 연구>의 무대인 ‘유리’에서 호서(湖西=서양)로 건너간 순례자가 주인공 시동에게 의발을 전수함으로써 그를 제8조로 삼는 이야기를 그렸다.

호동(=동양)에서 온 순례자가 호서의 구도자에게 가르침을 전한다는 설정은 <잡설품>의 내적 논리인 동시에 이 작품이 놓인 배경과 맥락에 대해서도 말해 주는 바가 크다. 작가는 “서구는 모든 추상적인 것을 구상화함으로써 과학의 눈부신 발전을 이룬 대신 정신이 왜소해졌다”며 “구상적인 것을 추상화하는 동양적 사고로써 서구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나아가 “지난 수십 세기 동안 서구가 세계문학의 주류로 행세해 왔지만, 이제쯤은 우리가 주류의 계관을 찬탈해 올 때가 되지 않았는가 한다”고 주장했다.


박상륭 씨.
박상륭 씨.
그가 새 소설의 제목으로 쓴 ‘잡설’(雜說)이란 소설과 철학과 경전 그 어느 것도 아니되 그 모두를 아우르는 텍스트를 이르는 말이다. 신의 죽음을 선언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역시 잡설이지만 그것은 ‘몰락의 축’에서 씌어졌다는 것이 작가의 판단이다. 반면 <잡설품>은 인간의 재림을 통한 신성의 회복을 추구함으로써 ‘상승의 축’에서 씌어졌다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변증법의 안티테제라면 <잡설품>은 진테제에 해당한다고도 작가는 설명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재림은 어떻게 가능한가. 자벌레의 비유가 여기서 동원된다. 자벌레가 날개를 얻어 나비로 ‘진화’하는 것은 어떤 외부의 조력에 의해서가 아니다. 온몸으로 기어가는 고행의 끝에서 구상의 껍질을 벗고 마침내 날개를 얻어 날아 오르는 것은 순전히 제 혼자 힘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이는 외부의 초월적 존재(=신)를 만들어 내거나 살해하는 서양적 사고로는 도달하기 힘든, 동양적 ‘마음의 우주’의 작용이라는 것이 작가의 믿음이다.


<잡설품>은 기왕의 박상륭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쉽게 읽히지 않는 작품이다. 그렇지만 작가는 ‘난해하다’는 칭찬 아닌 칭찬은 사양하겠노라고 밝혔다. “작가가 모든 계층의 독자를 만족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박상륭 소설은 무척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1969년 캐나다로 이민 간 그는 지금은 밴쿠버와 서울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김윤식 교수의 부름에 응해 ‘하산’했지만, “이제 다시 이민길에 오른다면 이것이 마지막 길이 되지 않을까 한다”고 그는 말했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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