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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세계 공항서점엔 꼭 이 책들이 있다네

등록 2011-07-08 21:20수정 2011-07-10 15:20

소설가 김연수의 추천서
빨리 읽히는 모험·음모 소설 등
장시간 비행기 타며 읽기 좋아
어느 해 여름, 독일 함부르크에 며칠간 다녀오면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들고 간 적이 있었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그런 책을 읽으면 인생이 좀 그럴듯해질 것 같은 예감 때문에 챙겼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고, 웬만한 책으로는 11시간을 버티기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결과는? 들고 다니느라 팔뚝만 굵어졌달까. 좀 읽을라치면 밥을 먹어야 했고, 밥 먹고 나니 면세품을 팔았고, 면세품 카트가 지나가고 나니까 자라며 창문을 다 닫아버렸다.

공항이나 기내에서 책을 읽는 일은 이토록 어렵다. 특히 기내에서는 잠을 자기도 어려운 환경이라 책에 집중한다는 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낫다. 기내지를 보면 대개 최상급의 종이에 멋진 화보를 많이 수록했는데, 이런 편집은 이코노미석에 앉은 자들이 활자를 얼마나 꺼리는지 잘 보여준다. 이코노미석에서는 잠자는 것도 어렵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거기서는 하이데거가 옆자리에 앉아서 <존재와 시간>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한대도 귀찮기만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공항서적이라는 게 있다. 이 특수한 목적의 서적들은 전세계 모든 공항에서 똑같이 발견된다. 세계 어디를 가나 공항서점의 규모는 가판대 수준인데, 그 이유는 비행기 이코노미석의 악조건을 견딜 수 있는 책은 겨우 그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행안내서와 회화책과 지도와 잡지를 제외하고 이들 공항서적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일 먼저 공항소설이라는 게 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공항소설이란 매우 두껍지만 빠르게 읽히는 모험, 혹은 음모에 관한 소설로 공항서점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한마디로 공항과 기내에서만 읽고는 버리는 흥미 위주의 소설이다. 한가한 사람들의 말재간에서 나온 용어인 것 같지만, 의외로 이 장르의 역사는 오래됐다. 예컨대 프랑스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런 소설을 ‘철도소설’(romans de gare)이라고 불렀다. 비슷하게 우리에게는 휴게소 편의점에서 할인판매하는 ‘휴게소 소설’이 있다.

전형적인 공항소설로는 존 그리샴의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시공사),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조디 피콜트의 <19분> 같은 것들이 있다. 이 소설들의 공통점을 말하자면, 너무 심오하거나 철학적이지 말아야만 한다는 점이다. 공항 대합실과 기내에서 책을 읽는 일은 혼자 집에서 책을 읽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가능한 한 두꺼워야만 한다. 비행기가 연착하거나 환승에 시간이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페이퍼백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다 읽고 나면 바로 버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공항철학서가 있다면, 아마도 그건 알랭 드 보통의 책들일 것이다. 여객기에서 바로 옆에 앉았다는 인연으로 시작되는 연애를 다룬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나 여객기 창의 풍경을 표지로 삼은 <여행의 기술>, 혹은 더 노골적으로는 영국 히스로 공항의 호의에 힘입어 쓴 <공항에서 일주일을>(청미래) 등은 공항서점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꽤 흥미로운 책으로 느껴지리라. 너무 심오하거나 철학적이지 말아야만 한다는 원칙과 명색이 철학서라는 이 책들이 어떻게 행복하게 합일하는가는 직접 책을 펼쳐보면 알 수 있으리라. 하이데거도 좀 노력해서 알랭 드 보통처럼 썼더라면…. 그런 상상이 가능한 것도 다 이코노미석에 앉았기 때문이다. 비즈니스석에만 앉았어도 반대로 생각했을 텐데.

마찬가지로 공항서점에 가면 공항여행기를 만날 수 있다. 이 책들은 무엇보다도 두껍다. 공항여행기의 대표적인 작가들이라면 폴 서루, 빌 브라이슨, 세스 노터봄 등을 들 수 있다. 서루의 경우에는 <중국기행>과 <유라시아 횡단 기행>이 나와 있다. 세스 노터봄 역시 <산티아고 가는 길>(민음사)과 여행소설에 더 가까운 <이스파한에서의 하룻저녁>이 나와 있다.

빌 브라이슨은 상대적으로 많은 책들이 번역됐다. <나를 부르는 숲>과 <발칙한 유럽산책>(21세기북스)을 비롯한 ‘발칙한 산책’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폴 서루와 빌 브라이슨은 전세계의 어느 공항에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의 여행기는 공항소설의 특징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두 사람 모두 시니컬한, 혹은 유머러스한 여행자로서 자신이 목격한 이국의 관습들을 기록했는데, 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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