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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가슴 뛰게 했던 선배들 다 어디로 가셨습니까

등록 2006-05-10 21:11수정 2006-05-11 14:18

김연수 소설가
김연수 소설가
저공비행
나 지금 상당히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요즘말로 슴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가슴이라면 나도 좀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다. 그저 평범한 가슴에 대한 것이라면 모르지만, 선후배들끼리 모인 가운데 느껴보는, 후끈 달아오를 정도로 뜨거운 가슴이라면 더구나. 그 가슴 때문에 내가 느끼는 위기감의 정체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허리들은 정직하신가? 아무런 문제가 없는가?

말하자면 이런 얘기다. 1989년에 대학교 입학시험을 치려고 서울에 올라온 적이 있었다. 후기 시험이었기 때문에 전기 시험에 합격한 친구 둘이 여행 삼아 나를 따라왔다. 예비소집에 응하고 시내로 내려가다 보니 대학로에서 대규모 노동자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일요일에 대학로에는 차량이 통제됐다. 이윽고 집회가 끝나고 노동자와 학생들이 종로 쪽으로 행진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인도에 나란히 서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수많은 깃발들이 바람에 나부꼈고 구호를 외치는 함성소리가 메아리쳤다. 마치 불어난 강물처럼 노동해방과 정권퇴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도로에 굽이쳤다. 그때 내 가슴이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모른다. 거기에는 두려움도 있었고 설렘도 있었고 감동도 있었다. 그게 무엇이든 가슴은 요란스레 뛰었다. 수험생이었던 내가 친구들과 함께 그 행렬에 합류한 까닭은 그 뛰는 가슴 때문이었다. 나로 인해 세계가 바뀔 수 있다니.

대학교에 들어가니 선배들은 진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수업보다는 선배들과 어울리면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학교 앞 어두운 막걸리집에서, 누군가의 자취방에서, 혹은 북한강의 강변에서. 그게 말로만 듣던 의식화의 한 과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때만 해도 세상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선배들의 말대로 또다른 진실이 있다면, 그리고 그 진실을 우리가 밝힐 수 있다면 그건 정말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두운 술집 구석이나 방에서 선배들에게 새로운 세상의 모습에 대해 전해들을 때면 늘 내 가슴은 처음으로 시위행렬을 볼 때처럼 두근거렸다. 누군가 손을 넣어 만져봤다면 깜짝 놀랄 정도로. 그 뛰는 가슴 때문에 나는 선배들의 말에 동의했다. 그 뛰는 가슴으로 바라본 세상은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내가 살아온 세상은 폭력과 속임수와 차별이 가득했지만, 내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은 더없이 밝고 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미래에 대해 낙관을 하게 된 것은 그때부터다. 혁명이 아니더라도 세상은 바뀔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두려워하고 때로는 설레며, 또 때로는 감격하면서 미래를 꿈꿨기 때문이었다. 그 근거 없는 낙관은 가슴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일을 경험하지만, 대부분은 잊어버린다. 하지만 가슴이 뛰었던 순간만은 쉽게 잊을 수 없다. 가슴이 뛴다는 것은 인생에서 우리가 진짜 우리로 살아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순간을 경험한다는 뜻이다.

그때의 선배들이 이제 40대가 되었고 나도 30대 후반이 됐다. 이제 가슴이 너무 심하게 뛴다면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뜻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긴 해도 나는 뛰는 가슴에 대해 조금 더 얘기하고 싶다. 술집에서 선배들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내가 알게 된 가슴의 세계에 대해 조금 더 얘기하고 싶다. 최근의 여론조사가 하도 절망적이라 그렇다. 내 가슴을 뛰게 한 선배들이 무능보다는 부패를 선호한단다. 맙소사, 믿기지가 않는다. 아무리 가슴을 만져대도, 금품 수수가 불거져도 끄떡없다고 한다. 나의 위기감은 바로 여기서 비롯한다. 나만 좀 이상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흔히들 40대는 우리의 허리 세대라고 한다. 이 허리들의 생각이 요즘 아리송하다.

김연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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