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근들 핵보유·고노담화 재검토 발언에 ‘긍정도 부정도 않는’ 모호전략 대응
‘대타’ 내세워 본심 드러내려는 의도 깔려 야당들 반격에도 계속 입 닫고 있을까
‘대타’ 내세워 본심 드러내려는 의도 깔려 야당들 반격에도 계속 입 닫고 있을까
안과 밖 지난 3일 미국 메이저리그와 일본 프로야구 선발팀 대항전 개막전이 열린 도쿄돔 구장. 시구를 마친 아베 신조 총리는 “국회에서 답변하는 이상으로 긴장했다”며 멋쩍게 웃었다. 그는 전날 총리 관저에서 스무번 이상 투구연습까지 했다. 그러나 그가 던진 공은 긴 포물선을 그린 뒤 운동장 바닥을 한번 치고선 포수의 글러브 안으로 튀어들어갔다. 공은 이미 스트라이크 존에서 한참 왼쪽으로 벗어난 상태였다. 다음날 일본 조간신문들은 시구식 사진을 일제히 실으면서 “중앙이 어렵다” “우편향을 주의하자니 왼쪽으로” 등의 제목을 달았다. 일본 안팎에 널리 알려진 아베의 극우 성향과 취임 뒤 자신의 색깔을 되도록 눌러온 아베의 처신을 염두에 둔 ‘이중화법’이다. 정치권과 언론에선 출범 달포를 맞은 아베 정권의 행로를, 초보 운전자에 빗대 ‘안전운행’으로 묘사해왔다. 아베의 신중한 언동은 자신이 내건 ‘싸우는 정치인’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무색케 할 정도다. 이 캐치프레이즈는 비판을 두려워 않고 소신대로 행동한다는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동원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극우 주장을 일삼았던 과거와는 크게 달라진 아베의 모습은 총리로서의 책임 있는 자세와 유연함으로 평가돼 전반적으로 호의적 반응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아베의 새 전략은 강력한 경쟁자였던 후쿠다 야스오 전 관방장관이 불출마를 선언해, 총리 당선이 확정적이던 지난 8월 초부터 가시화했다. 주변국과의 관계를 얼어붙게 만든 야스쿠니 참배 문제의 대응책이 시발점이다. 아베 주변에서는 그가 4월에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끝낸 사실을 언론에 흘리며 공개했지만, 아베는 철저하게 ‘긍정도 부정도 않는’(NCND) 자세로 일관했다. 외교안보 분야 학자·전문가들로 구성된 참모진이 그의 총리 등극을 앞두고 짜낸 놀라운 ‘꼼수’다. 일본에선 이를 ‘모호 전략’이라고 부른다. “야스쿠니 참배는 총리의 책무”라고 목소리를 높여온 아베가 소신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참배에 따른 국내외 비난의 예봉을 피하겠다는 의도였다. ‘할 말을 하는’ 또는 ‘주장하는’ 외교를 강조해온 이미지의 일부 손상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효과는 만점이었다. 이를 징검돌로 삼아 취임 열흘 남짓 만에 한국과 중국 방문을 성사시켰다. 전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망쳐놓은 주변국과의 정상외교를 단번에 복원함으로써 새 정권의 차별성을 극대화했다.
출범 한달 ‘안전운행’ 묘사 이 전략의 연장선에서 아베는 취임 뒤에도 ‘입조심’에 신경을 많이 썼다. 과거 자신의 발언이나 주장이 논란이 될 만하면 “개인의 견해였을 뿐”이라며 피해갔다. 침략전쟁과 식민지배를 통절하게 반성하고 사죄한 1995년 당시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의 담화가 대표적 사례다. 침략전쟁 책임론을 부정하는 아베는 이 담화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비슷한 내용의 패전 50돌 국회 결의에 불참해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바 있다. 아베는 ‘무라야마 담화’와 다른 정부의 역사인식을 새로 내놓겠다는 말을 했다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곧바로 후퇴했다. 자신의 발언을 잇따라 수정해 담화 계승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연행을 공식 인정한 93년 ‘고노 담화’도 마찬가지다. 아베가 “일본군위안부는 날조”라며 역사교과서에서 위안부와 강제연행 기술을 없애는 데 앞장서왔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고노 담화도 순순히 계승하겠다고 밝혔다. 인화성이 강한 역사인식과 관련해 정부 견해로 자리잡은 것은 일단 건드리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극우 성향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는 것을 차단하는 수법이다. 교육개혁을 논의하는 위원회에는 다양한 성향의 인사를 포진시켜 국가주의 교육 강화에 대한 우려를 희석시키기도 했다. 이런 아베의 행보에 대한 자민당 온건파나 시민단체의 반응은 ‘환영 반, 경계 반’이다. 고이즈미처럼 국내 양심세력과 주변국을 극도로 자극하지는 않아 다행스럽지만, 아베의 본심이 달라진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아베의 현재 모습을 ‘날카로운 발톱을 뒤에 감추고 있는 매’에 비유하기도 한다. 언제 다시 그것을 치켜들지 모른다는 얘기다. 아니나 다를까. 정상외교 부활과 핵실험에 따른 대북 적대감의 고조로 강경 성향의 아베 정권이 조기에 기반을 굳히면서 또다른 고단수의 수법을 동원했다. 아베가 하고 싶은 말들을 측근들이 대신하도록 하는 이른바 ‘대타 전략’이다. 도화선이 된 것은 지난달 초 북한의 핵실험이다. 다시 없는 호기를 잡았다고 여긴 나카가와 쇼이치 자민당 정조회장이 핵보유 검토 발언으로 치고 나갔다. 강경 우파의 숙원인 핵무장론을 공론화하려는 시도였다. 국내외의 파상적 비판에 봉착한 나카가와가 꼬리를 내리려 할 무렵 아소 다로 외상이 지원사격에 나섰다. 나카가와와 같은 주장을 편 아소는 쏟아지는 비판에 대해 “언론 봉쇄”라며 맞받았다. 자민당 정조회장이 어떤 자리인가. 집권당의 정책 총괄 책임자다. 외상은 일본 대외정책의 수장이다. 이들의 발언은 일본 정부·여당을 대변한 것으로 받아들여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런데 아베는 “비핵 3원칙은 반드시 지킨다. 일본 정부나 자민당에서 (핵보유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는 하지 않는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그리고는 이들의 발언을 “개인 견해”라며 묵인하거나, 언론자유를 내세워 은근히 두둔하기까지 한다. 뒤이어 나온 시모무라 하쿠분 관방부장관의 고노 담화 재검토 발언 때도 똑같은 양상이 벌어졌다. 정부 부대변인인 시모무라가 정부 견해인 고노 담화를 부정하는 발언을 하고 있는데도 아베는 묵인과 두둔으로 일관했다. 이들 사례에서 아베 쪽의 교묘한 꼼수를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정부·여당에 포진한 ‘아베 친위대’의 입을 통해 극우 주장을 마음껏 내뿜어, 비난의 화살이 아베 본인에겐 돌아가지 않게 하려는 수법이다. 일본 언론들도 시모무라 등이 아베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언론 비판칼날도 무뎌져 아베보다 한살 많은 나카가와는 역사교과서, 야스쿠니 참배, 개헌, 핵무장 등 모든 현안에서 아베와 코드가 가장 잘 맞는 단짝이다. 시모무라는 아베가 의원 초년병이던 시절부터 그의 분신처럼 행동해온 인물이다. 그래서 둘은 아베 정권이 출범하면서 요직에 발탁됐다. 아소 또한 극우 성향에서 아베에 못지 않다. 이들이 당 안팎과 주변국의 비난에 아랑곳않고 고장난 녹음기처럼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는 동안, 아베는 정부 방침 불변이라는 ‘방어막’ 뒤에 숨어 있다. 이런 수법은 아베가 본연의 정치성향을 분명히 하지 않는 데 대한 강경 우파의 불만을 달래려는 의도도 깔려 있다. 이런 일은 과거 온건보수 성향의 자민당 정권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각료가 정부 견해를 거스르는 발언을 하면, 예전에는 어김없이 총리나 관방장관의 엄중한 경고가 따랐다. 심지어 1999년 니시무라 신고는 방위청 정무차관 직책에 있었지만, 나카가와와 같은 주장을 폈다가 집중포화를 맞고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부·여당의 핵심 인사들이 정부 견해를 뒤집는 말을 되풀이해도, 아베는 ‘문제 없다’는 투다. 아베의 높은 여론 지지에 눌려, 이런 문제를 추궁하는 언론의 칼날도 무디기 그지 없다. 아베가 정권운영에 자신감을 갖기 시작하면서, 그의 전략은 모호성 유지에서 ‘눈가리고 아웅’하는 쪽으로 진화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수법은 직선적 성격인 고이즈미 전 총리와는 상당한 대조를 보인다. 고이즈미는 원래 정책의 일관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자신이 내뱉은 말에 집착하는 고집 하나는 누구에도 뒤지지 않는다. 그 고집을 꺾으려 할수록 더 엇길로 간다. 때문에 국내 야스쿠니 참배 반대파나 주변국과의 극단적 마찰이 불가피했다. 아베는 바로 이런 고이즈미를 반면교사로 삼아, 한결 교묘해진 꼼수를 찾아낸 것이다. 특히 최근에는 우파 언론들이 아베 정권의 이런 행태를 거들고 나서 더욱 주목된다. 주류 우파의 대변지인 <요미우리신문>은 얼마전 고노 담화와 관련한 사설을 잇따라 내놓으며 “사실 오인과 역사의 ‘날조’마저 계승할 필요가 없다”며 단호한 반박을 정부에 주문했다. 야스쿠니 참배를 고집하는 극우와 선을 분명히 그었던 이 신문은 아베가 야스쿠니 문제를 어느 정도 정리한 이후부터 전폭적 지원에 나섰다. 아베 쪽과의 교감을 짙게 풍긴다. 이 신문은 8일 사설에선 “핵보유 논의를 막는 것은 이상하다”며 나카가와 발언을 “책임있는 정치의 성실한 태도”로 추켜세우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이런 아베의 꼼수들이 언제까지나 통용될지는 불투명하다. 야당들이 한목소리로 아소 파면을 요구하는 등 정치 쟁점화에 나섰고, 자민당 온건파에서도 반격이 본격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건 성향의 니카이 도시히로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이 5일 아베 등의 주장이 계속되면 “임명권자(총리)의 책임을 묻게 된다”고 언급한 것은 이 문제가 ‘총리 책임론’으로 번져나갈 것임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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