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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기승전결 중 ‘전’에서 뚝심 밀어붙이죠”

등록 2006-12-07 23:07

만화작가 김세영씨의 서재. 그러나 김씨의 실제 작업공간은 바닥에 깔린 요 위다. 김씨는 엎드린 자세를 가장 좋아한다. 배를 깔고 누워 아이디어도 구상하고 수작업으로 원고도 쓴다. 사진속 웅크리고 있는 개는 김씨가 자기 가족을 모델로 지은 만화 <사랑해>에 나오는 바로 그 털복숭이 개다.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만화작가 김세영씨의 서재. 그러나 김씨의 실제 작업공간은 바닥에 깔린 요 위다. 김씨는 엎드린 자세를 가장 좋아한다. 배를 깔고 누워 아이디어도 구상하고 수작업으로 원고도 쓴다. 사진속 웅크리고 있는 개는 김씨가 자기 가족을 모델로 지은 만화 <사랑해>에 나오는 바로 그 털복숭이 개다.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이야기는 물론 칸 나누고 말풍선까지 콘티작업
만화작가가 영화감독이라면 만화가는 배우
‘타짜’ 치밀한 구성은 물흐르는대로 쫓아간 결과
‘콤비’ 허영만씨와는 세번째 헤어진 거예요
한국의 글쟁이들/⑭‘국가대표 만화작가’ 김세영

“만화작가는 만화에서 어디까지 합니까?”

지난 여름, 추석에 개봉하는 영화 <타짜>를 제작하기로 한 싸이더스FNH 차승재 대표는 원작 만화의 작가 김세영(53)씨를 만난 자리에서 질문을 던졌다. 김씨가 “콘티까지 짜서 넘긴다”고 말하자 차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면 한마디로 감독이네요? 만화가가 배우인 것이고.”

관객 670여만명을 동원하면서 올 하반기 최고 흥행작이 된 영화 <타짜>는 만화가 왜 ‘원 소스 멀티 유즈’ 시대의 총아인지를 다시 한번 보여줬다. 그리고 모든 문화상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이야기’의 힘이란 것도 입증했다. 그러나 이처럼 만화의 가치가 높아지고 있어도 정작 만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아직 모르는 이들이 많다. <타짜>만해도 원작자를 만화가 허영만씨로 아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원작자는 분명 이야기를 지어낸 만화작가 김세영씨다.

만화작가들이 만화 스토리를 쓰는 방식은 크게 시나리오식과 콘티식 두가지. 김씨는 늘 콘티 형태로 쓴다. 칸을 나누고 말풍선에 대사를 넣고 지문도 넣으며, 개별 장면의 이미지 배치까지 직접 연출한다. 그렇게 원고를 넘기면 만화가가 칸 안에 그림을 그려 넣는다. 만화작가가 작품의 아이디어 등 초기 단계까지만 맡는 것으로 여기기 쉽지만, 실제로는 만화 구성의 상당 부분-김씨의 경우는 거의 대부분-을 책임지는 것이다. 차승재 대표의 질문은 이런 일반적인 인식을 대신하는 물음이었고, 김씨의 설명을 들은 차씨가 “만화작가란 ‘영화감독’같은 사람”이라고 정의한 것은 만화작가가 하는 일에 대한 명쾌하고 정확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만화작가계에서 김세영씨가 가지는 상징성은 실로 크다. 만화판에서 만화가가 아닌 만화작가가 개인 브랜드를 지닌 경우는 그가 유일하다. 김씨는 스무살 만화가 지망생이던 1973년 우연히 만화 스토리를 보고 ‘나도 써볼 수 있겠다’ 싶어 한 번 지어본 습작이 작품으로 채택되면서 만화작가가 됐다. 올해로 33년째, 지금까지 5만~6만쪽 분량의 이야기를 썼다.

33년째…5만~6만쪽 이야기 써

김씨가 필명을 얻은 것은 허영만씨와 같이 한 첫 작품인 <카멜레온의 시>(1986)이 인기를 얻으면서 부터다. 이 만화에서 인용한 프랑스 초현실주의 시인 로트레아몽의 시집이 복간돼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기까지 했다. 이후 김씨는 허영만씨와 명콤비를 이뤄 <고독한 기타맨> <오! 한강> <사랑해> <미스터Q> 등 히트작을 줄줄이 내놓으면서 만화작가계의 간판스타가 된다.

그러나 만화작가의 위상은 항상 열악했다. 출세작 <카멜레온의 시>에 정작 그의 이름은 없었다. <오! 한강>이 잡지에 연재될 때 처음 이름이 들어갔지만 단행본에서는 이름이 다시 빠졌다. 만화계의 관행 탓이었다. 허영만씨와 <사랑해> <타짜>로 다시 만났을 때 그가 내 건 조건은 “이름 좀 알아볼 수 있게 내달라”는 것 하나였다. 그러나 <타짜>에서도 그의 이름은 표지 한 구석에 숨은 그림처럼 작게 들어갔다. 최근 다시 나온 <타짜>에서야 마침내 김씨의 이름 석자가 알아 볼 수 있게 표지에 나왔다. 가장 가슴 아팠던 기억은 딸에게 “이 책이 아빠가 쓴 거야”라고 보여줬는데 “그런데 왜 아빠 이름은 없어?”라고 되물었을 때였다. 오랜 세월 쌓인 이런 상처 때문에 그는 더욱 ‘만화스토리작가’라는 말 대신 ‘만화작가’란 이름을 강조한다. 스토리 작가란 말 자체가 실제 역할을 축소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일본처럼 ‘아무개 지음, 아무개 그림’으로 가야 한다고 믿는다.

만화계에서 김씨는 철저하게 집안에 틀어박혀 작업하기로 유명하다. 여권은 한번도 쓴 적이 없다. 대신 집안은 모두 그가 즐기는 것들로 꾸며놓고 산다. 넓은 마루벽 전체가 영화 디브이디이고, 음악시디와 책이 곳곳을 채우고 있다. 정작 만화는 잘 보지 않아 거의 없다. 20대에는 소설에, 30대에는 시에 빠져 살았는데 지금은 ‘잡독형’ 독서를 한다. “그냥 좋아서 영화보고 책봐요. 목적을 갖고 보면 재미가 없잖아요. 작품 쓸 때도 내가 좋아하는 걸 쓰는 것이고. 모르면 못쓰니까.”

김씨의 서재에는 항상 한 가운데에 요가 깔려 있다. 그 위에 엎드려 누워 구상도 하고 손으로 원고를 쓴다. “수평 자세일 때 가장 창조성이 샘솟는 듯하다”고 웃는다. “콘티는 칸 변화가 많고 말풍선이 다양해 컴퓨터보다는 수작업이 편해요. 의성어 넣거나 하기에도 효과적이구요.”

작업 특성상 만화 스토리를 쓰는 것은 이야기와 영상을 동시에 생각하며 화연 연출까지 구상 해야 한다. 치밀한 구상이 필요할 듯한데 정작 김씨는 “그때 그때 생각 나는대로 쓴다”고 답했다. 심지어 작품 전체 구성도 미리 짜지 않는다고 한다. 치밀한 전개와 반전이 돋보이는 <타짜>를 비롯해 거의 모든 작품이 구상하지 않고 시작해 생각나는대로 이야기를 이끌어갔다는 것이다. 취재? “<타짜>를 준비할 때 전문도박사를 이틀 동안 만난 것이 일생 동안 처음 해본 취재였어요.”

누운 수평자세일 때 창조성 샘솟아

그럼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샘물 퍼내듯 써내는 것일까. “그릇에 물이 있다고 쳐요. 물을 쏟아서 흘러가는 것을 저는 쫓아가는 거에요. 물이 여러 갈래로 나뉘면 하나를 고르는 거죠. 쏟을 물을 채우는게 주인공 캐릭터를 만드는 거에요. 어떤 성격인지 어떤 일 하는지 정하면 그 다음에 이야기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이야기를 푸는 한가지 요령이 더 있다면 “사실은 거짓처럼, 거짓은 사실처럼, 없었던 일은 있었던 것처럼, 있었던 일은 없었던 것처럼” 쓰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씨는 만화작가란 직업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스타일도 아니다. 만화작가가 된 것도 “쉽게 돈벌 수 있어서, 조금 일하고 계속 놀 수 있어서”였다고 털어놓는다. 허영만 화백이 그에게 가장 불만스러워했던 것도 김씨가 만화를 생업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사실 주업은 없고 알바하는 기분으로 일했어요. 물론 할 때는 잘하려고 했지만. 지금도 내가 원하는 대로 그림이 안나올 때는 내 직업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나치게 빠져들어 허우적 대지 않는 그런 방식이 그의 성공비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화계가 꼽는 김세영의 가장 큰 성공요인은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스토리의 완결성을 유지하는 뚝심이다. 용두사미가 일반적인 한국 만화판에서 극히 드문 경우다. 이런 뚝심은 바둑에서 배웠다고 한다. 백수 시절, 김씨는 도피하는 심정으로 기원에서 바둑만 두고 살았다. 1급이긴 했지만 책보고 배운 김씨의 바둑은 온실속 화초였고, 그래서 모양을 잘 만들어놓고도 급소 한방에 무너지기 일쑤였다. 악을 쓰고 실전에 매달려 두들겨 맞아도 다시 일어나는 바둑으로 스타일을 바꿨다. “이야기를 쓸 때는 기승전결에서 ‘전’이 가장 어려워요. 전에서 뚝심을 잃지 않고 밀어붙이는 데 바둑에서 버티는 허리힘을 익힌게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유명해진만큼 경제적으로 그는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한 분야를 대표하는 위상에 견줘보면 그리 대단한 편은 아니다. <타짜> 이전에는 이름을 알렸어도 빚쟁이로 살았다. <타짜> 하나로 10억원 넘게 벌면서 비로소 살림에 볕이 들었다고 한다.

만화팬들이 김씨에게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히트 보증수표인 파트너 허영만 화백과 헤어진 점이다. 김씨는 “서로 나름대로 일해보려고 헤어진 것”이라고 웃으며 설명한다. “이번이 세 번째 헤어진 건데요? 영화감독과 배우도 찍고나면 헤어지는 거과 비슷한 거에요.”

이름을 얻고, 허영만 화백과 떨어져 홀로 서기에 나서면서 그의 작업 방식도 바뀌었다. 그의 이름을 앞에 세우고 신예작가를 기용해 만화를 내놓고 있다. 그러나 바로 지금이 그의 만화인생에서는 중대한 고비가 될 전망이다.

실험적인 만화 해보고 싶어

출판사들이 그에게 신예급을 붙이는 것은 고료는 정해져 있는데 김씨가 유명하니 비용이 싼 만화가로 생산비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타짜> 이후 그의 작품들은 “재미는 확실하다”는 평을 들었지만 완성도면에서는 모두 실패에 가까웠다. 공전의 히트작 <타짜>도 오히려 그에게 족쇄가 되고 있다. 매체들과 출판사는 도박만화만을 집요하게 요구해댄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그의 브랜드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스스로 그걸 잘 알지만 열악한 한국 만화시장 현실속에서 뾰족한 대안을 찾기란 쉽지 않다.

김세영의 현실은 곧 한국 만화의 현실이다. 그래서 이 ‘국가대표 만화작가’의 행보는 눈여겨 볼 수 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는 실험적인 만화를 해보고 싶은데, 생업을 떠난 작품은 발표할 지면도 없어요. 그래도 앞으로는 조금씩 그런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글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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