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 문화평론가
정윤수의 문화 가로지르기 / 현대의 성과 사랑, 이 고전적인 주제와 관련된 외국 다큐멘터리물을 보게 되었다. 현대 풍속사에 관한 자료인 줄 알았는데 화면에 흐르는 내용은 ‘성인물 변천사’였다. 고색창연한 흑백 무성영화 시대부터 온갖 성인잡지와 영화들 그리고 인터넷 시대의 성인물 유통에 이르기까지 깔끔하게 정리된 연대기였다. 그것을 보면서, 잠시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술이나 형태는 달라도 육체적인 ‘사랑법’에는 큰 변화가 없다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확인했던 것이다. 저 무성 영화 시대에나 총천연색 필름에나 침대가 놓여 있고 남녀가 그 위에서 사랑의 행위를 펼치고 있었다. 변하고 발전한 것은 그것을 담는 그릇일 뿐, 그 안의 내용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사랑의 극치감을 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하는(물론 대체로 연출되어 과장된 것이지만) 다양한 인간 군상의 열렬한 몸짓은 기술 변천과 무관하게 한 나무에서 나온 열매처럼 변함이 없어 보였던 것이다. 혹시, 우리네 삶도 저와 같은 것이 아닐까, 나는 잠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성인물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전혀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얼마 전에 전해 들은 초등학교 이야기 때문이었다. 내 사는 곳의 어느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 얘기다. 몇 차례 ‘말썽’을 부린 일로 이래저래 이름이 알려진 아이였다. 일간지 사회면에 대서특필될 만한 ‘사건’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학교의 선생님과 아이들 그리고 오늘날의 교육 상황에 의하여 학교 안의 사정을 시시콜콜히 전해 들을 수밖에 없는 해당 학년의 부모들한테는 어느 정도 긴급하게 들릴 만한 일들이 몇 번 있었다. 복도에서 싸움을 한다거나 집에서는 나갔는데 학교에는 오지 않는 일들이었다. 걱정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6학년이라면 동네 중고교 학생들한테는 조무래기 꼬마지만, 초등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만큼은 거칠 게 없는 최고 학년이다. 그 작은 집단에서 최고 학년의 ‘짱’이라면 친구들은 물론 선생님들도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경우가 된다. 유리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어린 나이인데 여기에 ‘짱’이라는 허울이 덧붙여져서, 때로는 위험한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도 하는 나이다. 그런데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강제 전학’이라는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아이와 아무 연고도 없는 내 귀에까지 ‘강제 전학’이라는 말이 들려올 정도라면 아마도 학교 안에서는 상당한 현실성이 있는 듯싶어 보인다. 말썽쟁이 아이가 ‘강제 전학’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가 되었다면 우려할 만한 일이 몇 번쯤 발생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강제 전학’, 이 용어만큼은 한사코 멀리해야 할 것이다. 초등학교 과정에서도 ‘강제 전학’이 실제로 집행되는지 모르겠으나, 그 실행 여부를 떠나서, 이런 ‘초강경’ 결정이란 교육 관계자 모두에게 뼈아픈 상처와 죄의식만 남길 뿐이다. 그 아이와 부모의 마음이 더욱 짙은 그림자로 우울하게 변해버릴 것임은 틀림없으려니와 이런 결정을 내린 학교 당국이나 담임 선생님 모두에게도 강렬한 죄의식이 화인처럼 남게 된다. 그 또래 아이들의 심리 상태는, 때로 자신에게 더없이 자애로운 사람에게도 신경질적으로 행동한다는 점에서, 매우 복잡하고 아슬아슬한 것이어서 ‘너그럽게 포용한다’는 식의 말이 얼마나 무익한 권유인가를 전혀 모르는 바는 아니다. 담임 선생님의 고충 또한 측량하기 어려울 만큼 클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강제 전학’은 집어들 수 있는 카드가 아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우상의 눈물>이 있다. 박근형이 교사로 주연을 했고 진유영, 이구순, 권기선이 출연한 작품인데, 전상국의 소설이 원작이다. 어느 고등학교가 있고 문제 학생이 있으며 모범생과 헌신적인 선생님이 등장하는 1981년도 작품이다. 소설도 그 무렵에 발표되었는데, 그러니까 이 소설과 영화는 한 세대 전의 우리 사회를 잘 보여준다. 한 세대 전의 <우상의 눈물>은 비극으로 끝이 난다. ‘불량 학생’ 최기표를 길들여 나가는 과정은 실패로 끝이 나고, 그 아이는 학교를 영영 떠나 버린다. 그가 학교 유리창이라도 깨부수면서 사라진 것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소설의 끝에 이르면 말없이 사라진 최기표의 마지막 편지가 보인다. 인용하건대 “기표가 바로 밑의 여동생한테 보낸 편지였다. 편지 맨 앞줄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무섭다. 나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흘렀다. 올림픽도 치렀고 월드컵도 치렀다. 경제 위기의 연속이라지만 한 세대 전보다는 나아진 것은 사실이다. 13개이던 서울 수계 한강 다리도 24개로 늘어났다. 하지만 그릇만 변했을 뿐, 그 안의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그 아이가 ‘강제 전학’을 당하면 아마도 옮겨간 학교에서도 그 아이가 맘 편히 교실 생활을 할 가능성은 낮다. 그 아이 역시 최기표처럼 세상의 온갖 ‘선한 자’들을 두려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배제’의 원리, 초등학교에서만큼은 작동되어서는 안 된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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